삼국지 동이전 마한편_낙랑군의 쇠약과 대방군의 등장
삼국지 동이전 마한편_낙랑군의 쇠약과 대방군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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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
○ 桓·靈之末, 韓濊註 167彊盛, 郡縣不能制, 民多流入韓國.註 168 建安中, 公孫康分屯有縣以南荒地爲帶方郡, 兩漢志, 樂浪郡屯有縣. 李兆洛云, 今朝鮮平壤城南. 丁謙曰, 帶方郡治所在, 前人均木言及. 漢地理志, 樂浪含資縣有帶水, 西至帶方, 入海. 査京畿道北境, 有臨津江, 發源江原道伊川郡, 北至開城, 西南入海, 正在樂浪之南. 再南, 卽百濟境. 以形勢揆之, 當卽漢時帶水. 然則伊川郡, 其漢之含資縣乎. 辰韓渠帥, 先詣含資降. 可知含資, 實辰韓至樂浪孔道. 今伊川郡, 居平壤東南, 情形尤協. 以此觀之, 臨津江, 於開城西南入海, 非卽帶方郡地之所在耶. 今定以開城郡爲帶方, 或相去不遠矣. 遣公孫模·張敞等收集遺民, 興兵伐韓濊, 舊民稍出, 是後倭韓遂屬帶方.
원문과 교주 :
○ 桓·靈之末, 韓濊註 167彊盛, 郡縣不能制, 民多流入韓國.註 168 建安中, 公孫康分屯有縣以南荒地爲帶方郡, 兩漢志, 樂浪郡屯有縣. 李兆洛云, 今朝鮮平壤城南. 丁謙曰, 帶方郡治所在, 前人均木言及. 漢地理志, 樂浪含資縣有帶水, 西至帶方, 入海. 査京畿道北境, 有臨津江, 發源江原道伊川郡, 北至開城, 西南入海, 正在樂浪之南. 再南, 卽百濟境. 以形勢揆之, 當卽漢時帶水. 然則伊川郡, 其漢之含資縣乎. 辰韓渠帥, 先詣含資降. 可知含資, 實辰韓至樂浪孔道. 今伊川郡, 居平壤東南, 情形尤協. 以此觀之, 臨津江, 於開城西南入海, 非卽帶方郡地之所在耶. 今定以開城郡爲帶方, 或相去不遠矣. 遣公孫模·張敞等收集遺民, 興兵伐韓濊, 舊民稍出, 是後倭韓遂屬帶方. |
번역 :
"[한나라 시즌2後漢의] 환제桓帝·영제靈帝 말기末期에는
한韓과 예濊가 강성하여 [한漢 왕조의] 군郡·현縣이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니,
[군현郡縣의] 많은 백성들이 한국韓國(=마한)으로 유입되었다.
건안建安 연간(A.D.196~220; 백제百濟 초고왕肖古王 31년~구수왕仇首王 7년)에
공손강公孫康이 (낙랑군의) 둔유현屯有縣 이남의 황무지를 분할하여
대방군帶方郡으로 만들고, 공손모公孫模·장창張敞 등을 파견하여
한漢나라의 흩어진 백성(遺民)을 모아 군대를 일으켜서 한韓과 예濊를 정벌하자,
[한韓·예濊에 있던] 옛 백성들이 차츰 돌아오고, 이 뒤에 왜倭와 한韓은 드디어 대방帶方에 복속되었다."_삼국지 동이전 마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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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 시즌2 즉 후한後漢의] 환제(桓帝)·영제(靈帝) 이 2명의 황제들의 통치의 말기末期에 한(韓=마한(馬韓))과 예(濊=동예)가 강성하여 [한(漢)나라의] 군(郡)·현(縣)이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니, [군현(郡縣)의] 많은 백성들이 한국(韓國=마한)으로 유입되었다.
건안(建安) 연간(서기A.D.196~220; 마한의 소국 백제百濟의 족장 초고肖古 31년~족장 구수仇首의 7년)에 공손강公孫康이 둔유현屯有縣의 남쪽의 황무지를 분할하여 대방군(帶方郡)으로 만들고, 공손모(公孫模)·장창(張敞) 이 2명의 장군 등을 파견하여 한(漢)나라의 흩어진 백성(遺民)을 모아 군대를 일으켜서 한(韓)과 예(濊)를 정벌하자, [한(韓)·예(濊)에 있던] 옛 백성들이 차츰 돌아오고, 이 뒤에 왜(倭)와 한(韓)은 드디어 대방(帶方)에 복속되었다."_삼국지 동이전 마한편
// 영어로 번역
"In the late reigns of Emperor Huan and Emperor Ling in the season 2 of Later Han, Han and Ye became strong, and the provinces and counties of the Han Dynasty could not properly control them, leading many people from these regions to flow into Han Korea (also known as Mahan).
During the Jianan era (A.D. 196~220; from the 31st year of King Chogo to the 7th year of King Gusu of Baekje), Gongsun Kang divided the wasteland south of the Tunyou county of Nakrang-gun into the Daifang county, and dispatched Gongsun Mo and Zhang Chang, among others. They gathered the scattered people of Han, raised an army and suppressed Han and Ye. Gradually, the old residents who had been in Han and Ye started to return. Afterwards, Wa and Han finally fell under the jurisdiction of Daifang." _Samgukji Dongyijun Mahan Edition
Note: This translation attempted to convey the original text as faithfully as possible, while taking some liberties to ensure a coherent English narrative. The names are translated directly from the Korean, and could have different accepted forms in English litera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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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桓·靈之末, 韓濊註 167彊盛, 郡縣不能制, 民多流入韓國.註 168 建安中, 公孫康分屯有縣以南荒地爲帶方郡, 兩漢志, 樂浪郡屯有縣. 李兆洛云, 今朝鮮平壤城南. 丁謙曰, 帶方郡治所在, 前人均木言及. 漢地理志, 樂浪含資縣有帶水, 西至帶方, 入海. 査京畿道北境, 有臨津江, 發源江原道伊川郡, 北至開城, 西南入海, 正在樂浪之南. 再南, 卽百濟境. 以形勢揆之, 當卽漢時帶水. 然則伊川郡, 其漢之含資縣乎. 辰韓渠帥, 先詣含資降. 可知含資, 實辰韓至樂浪孔道. 今伊川郡, 居平壤東南, 情形尤協. 以此觀之, 臨津江, 於開城西南入海, 非卽帶方郡地之所在耶. 今定以開城郡爲帶方, 或相去不遠矣. 遣公孫模·張敞等收集遺民, 興兵伐韓濊, 舊民稍出, 是後倭韓遂屬帶方.
註 167 韓濊 : 여기의 韓濊가 흔히 이르는 韓과 濊로 보기도 하지만 이것을 連稱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三國志』「東夷傳」의 韓條에는 韓濊에 관한 언급이 비교적 많은데, 弁辰傳에도 ‘國出鐵 韓濊倭皆從取之’라고 하는 記事가 있다.
이 자료에 따르면 韓과 濊로 나누어 보는 것이 옳은 것 같다. 그것은 다음에 오는 倭가 독자적인 單位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韓濊를 말하게 될 때는 高句麗 廣開土王陵碑에 나타나는 韓濊를 생각나게 한다. 여기에도 韓濊가 여러번 나오기 때문이다.
新來韓濊 沙水城二家爲看烟 …… 吾躬巡所略來韓穢令備酒掃言敎如此是以 …… 如敎今取韓穢二百廿家
廣開土王陵碑에서는 穢로 쓰고 있으나 濊와 穢는 모두 같은 뜻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말하는 韓穢가 『三國志』韓傳의 韓濊와 同一한 것인가는 더 연구를 필요로 한다.
≪參考文獻≫
千寬宇, 『高句麗廣開土王陵』(碑銘縮本) 1918, 朝鮮總督府; 「廣開土王陵碑文再論」『全海宗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1979.
文崇一, 「穢貊民族文化及其史料」『民族硏究所集刊』5, 1958.
金廷鶴, 「韓國民族形成史」『韓國文化史大系』Ⅰ, 1964.
李進熙, 『廣開土王陵碑の硏究』1972, 吉川弘文舘, 東京.
尹武炳, 「濊貊考」『白山學報』1, 1966.
金貞培, 「濊貊族에 關한 硏究」『白山學報』5, 1968.
朴性鳳, 「廣開土好太王期 高句麗南進의 性格」『韓國史硏究』27, 1979.
朴時亨, 『광개토왕릉비』1966, 사회과학원 출판사.
津田左右吉, 「好太王征服地考」『朝鮮歷史地理』1913, 南滿洲鐵道株式會社.
三上次男, 「穢人とその民族的性格について」『朝鮮學報』2輯, 1951; 「東北アジアにおける有文土器系社會と穢人」『古代東北アジア史硏究』1966.
三品彰藏, 「濊貊小考-民族關係文獻批判に因んて-」『朝鮮學報』4輯, 1953.
酒井改棻, 「好太王碑面の地名について」『朝鮮學報』8輯, 1955.
岡崎敬, 「夫租薉君銀印をめぐる諸問題」『朝鮮學報』46輯, 1968.
水谷悌二郞, 「好太王碑考-別册 水谷拓本-』1977, 開明書院, 東京.
李淳鎭, 「夫租薉君墓について」『考古學硏究』14卷 4號, 1968.
白鍊行, 「夫租薉君印について」『考古學硏究』14卷 4號, 1968.
註 168 民多流入韓國 : 『三國志』「東夷傳」韓條에는 ‘桓·靈之末’이라 하였는데, 대체로 百濟의 肖古王代(166~213)의 일로 보인다.
中國에서 內亂 등으로 소요가 심할 때 많은 피난민들이 우리나라로 들어오곤 하였다. 辰韓지역에도 秦의 亡人들이 들어 올 수 있으나 辰과 秦이 音이 유사하므로 實體보다 과장이 있을 수도 있다.
주제분류정치>군사>전쟁>전투유형
정치>군사>전쟁>전쟁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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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後漢의] 桓帝·靈帝 末期에는 韓과 濊註 167가 강성하여 [漢의] 郡·縣이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니, [郡縣의] 많은 백성들이 韓國으로 유입되었다.註 168
建安 연간(A.D.196~220; 百濟 肖古王 31~仇首王 7)에 公孫康이 屯有縣 이남의 황무지를 분할하여 帶方郡으로 만들고, 公孫模·張敞 등을 파견하여 漢의 遺民을 모아 군대를 일으켜서 韓과 濊를 정벌하자, [韓·濊에 있던] 옛 백성들이 차츰 돌아오고, 이 뒤에 倭와 韓은 드디어 帶方에 복속되었다.
註 167 韓濊 : 여기의 韓濊가 흔히 이르는 韓과 濊로 보기도 하지만 이것을 連稱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三國志』「東夷傳」의 韓條에는 韓濊에 관한 언급이 비교적 많은데, 弁辰傳에도 ‘國出鐵 韓濊倭皆從取之’라고 하는 記事가 있다.
이 자료에 따르면 韓과 濊로 나누어 보는 것이 옳은 것 같다. 그것은 다음에 오는 倭가 독자적인 單位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韓濊를 말하게 될 때는 高句麗 廣開土王陵碑에 나타나는 韓濊를 생각나게 한다. 여기에도 韓濊가 여러번 나오기 때문이다.
新來韓濊 沙水城二家爲看烟 …… 吾躬巡所略來韓穢令備酒掃言敎如此是以 …… 如敎今取韓穢二百廿家
廣開土王陵碑에서는 穢로 쓰고 있으나 濊와 穢는 모두 같은 뜻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말하는 韓穢가 『三國志』韓傳의 韓濊와 同一한 것인가는 더 연구를 필요로 한다.
≪參考文獻≫
千寬宇, 『高句麗廣開土王陵』(碑銘縮本) 1918, 朝鮮總督府; 「廣開土王陵碑文再論」『全海宗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1979.
文崇一, 「穢貊民族文化及其史料」『民族硏究所集刊』5, 1958.
金廷鶴, 「韓國民族形成史」『韓國文化史大系』Ⅰ, 1964.
李進熙, 『廣開土王陵碑の硏究』1972, 吉川弘文舘, 東京.
尹武炳, 「濊貊考」『白山學報』1, 1966.
金貞培, 「濊貊族에 關한 硏究」『白山學報』5, 1968.
朴性鳳, 「廣開土好太王期 高句麗南進의 性格」『韓國史硏究』27, 1979.
朴時亨, 『광개토왕릉비』1966, 사회과학원 출판사.
津田左右吉, 「好太王征服地考」『朝鮮歷史地理』1913, 南滿洲鐵道株式會社.
三上次男, 「穢人とその民族的性格について」『朝鮮學報』2輯, 1951; 「東北アジアにおける有文土器系社會と穢人」『古代東北アジア史硏究』1966.
三品彰藏, 「濊貊小考-民族關係文獻批判に因んて-」『朝鮮學報』4輯, 1953.
酒井改棻, 「好太王碑面の地名について」『朝鮮學報』8輯, 1955.
岡崎敬, 「夫租薉君銀印をめぐる諸問題」『朝鮮學報』46輯, 1968.
水谷悌二郞, 「好太王碑考-別册 水谷拓本-』1977, 開明書院, 東京.
李淳鎭, 「夫租薉君墓について」『考古學硏究』14卷 4號, 1968.
白鍊行, 「夫租薉君印について」『考古學硏究』14卷 4號, 1968.
註 168 民多流入韓國 : 『三國志』「東夷傳」韓條에는 ‘桓·靈之末’이라 하였는데, 대체로 百濟의 肖古王代(166~213)의 일로 보인다.
中國에서 內亂 등으로 소요가 심할 때 많은 피난민들이 우리나라로 들어오곤 하였다. 辰韓지역에도 秦의 亡人들이 들어 올 수 있으나 辰과 秦이 音이 유사하므로 實體보다 과장이 있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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