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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창대군 이의의 최후

 영창대군 이의의 최후  영창대군 이의의 최후 // 광해군일기[중초본] 74권, 광해 6년 1월 13일 병인 5번째기사 1614년 명 만력(萬曆) 42년정항을 강화 부사로 삼다국역원문중초본/정초본.원본 보기 정항(鄭沆)을 강화 부사로 삼았다. 【〈정항은 무인(武人)이다. 임해군(臨海君)이 귀양가자 이정표(李廷彪)가 살해했고, 영창 대군(永昌大君)이 귀양가자 정항이 살해했다. 그러므로 총행이 비할 데 없었다. 그 뒤에 두 사람이 잇따라 죽자 사람들이 모두 하늘이 내린 앙화라고 하였다. 대군이 죽을 때의 나이가 9세였다. 정항이 강화 부사로 도임한 뒤에 대군에게 양식을 주지 않았고, 주는 밥에는 모래와 흙을 섞어 주어서 목에 넘어갈 수 없도록 하였다. 읍 안의 한 작은 관리로서 영창 대군의 위리(圍籬)를 수직한 자가 있었는데 불쌍히 여겨 몰래 밥을 품고 가서 먹였는데 정항이 그것을 알고는 곤장을 쳐서 내쫓았다. 그러므로 대군이 이때부터 밥을 얻어 먹지 못하여 기력이 다하여 죽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정항은 그가 빨리 죽지 않을까 걱정하여 그 온돌에 불을 때서 아주 뜨겁게 해서 태워 죽였다. 대군이 종일 문지방을 붙잡고 서 있다가 힘이 다하여 떨어지니 옆구리의 뼈가 다 탔다."고 하였다. 지금도 강화도 사람들은 그 말을 하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다.〉 】 【태백산사고본】 27책 27권 16장 A면【국편영인본】 32책 273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以鄭沆爲江華府使。 (【沆, 武人也。 臨海之竄, 李廷彪殺之; 大君之竄, 鄭沆殺之。 故寵幸無比, 其後二人, 相繼俱斃, 人皆謂天殃。 大君死時, 年九歲。 沆到任之後, 絶其餼稟, 所饋飯和以沙土, 使不得入喉。 邑中有一小吏, 守直圍籬者憐之, 密懷飯饋之, 沆覺而杖逐之。 故大君自此不得食, 氣盡而死。 (或云) 沆患其不速斃, 火其堗, 極熱燒殺之。 大君攀戶立終日, 力竭而墮, 脅骨盡燒。 至今江華人言之, 莫不泣下。】) 【태백산사고본】 27책 27권 16장 A면【국편영인본】 32책 273면 【분류】 인사-임...

세종 : 저 산적 두 놈을 황소수레에 묶어 사지를 찢어 죽여랏!

 세종 : 저 산적 두 놈을 황소수레에 묶어 사지를 찢어 죽여랏! 세종실록 32권, 세종 8년 5월 19일 임자 3번째기사 1426년 명 선덕(宣德) 1년화적 진내·근내를 거열하다국역원문.원본 보기 화적(火賊) 진내(陳乃)·근내(斤乃)를 거열(車裂)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1책 32권 21장 A면【국편영인본】 3책 27면 【분류】 사법-치안(治安) / 사법-행형(行刑) 🌕轘放火賊陳乃、斤乃。 【태백산사고본】 11책 32권 21장 A면【국편영인본】 3책 27면 【분류】 사법-치안(治安) / 사법-행형(行刑) // 산적 두 명을 잡아서 참수도 아니고 황소 수레에 사지 묶어서 철썩 하고선 찢어죽임

세종 : 고려 왕들의 초상화를 싸그리 다 태워라!

 세종 : 고려 왕들의 초상화를 싸그리 다 태워라!  세종실록 32권, 세종 8년 5월 19일 임자 9번째기사 1426년 명 선덕(宣德) 1년도화원에 간수된 전조 역대 군왕·비주의 영자초도와 정릉의 반영을 불태우게 하다국역원문.원본 보기 예조에서 도화원(圖畫院)의 정문(呈文)에 의하여 계하기를, "도화원에 간수된 전조(前朝) 왕씨(王氏)의 역대 군왕과 비주(妃主)의 영자초도(影子草圖)를 불태우기를 청합니다." 하니, 명하여 정릉(貞陵)의 반영(半影)도 아울러 불태우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1책 32권 23장 B면【국편영인본】 3책 28면 【분류】 역사-전사(前史) / 예술-미술(美術) ○禮曹據圖畫院呈啓: "院藏前朝王氏歷代君王與妃主影子草圖, 請火之。" 命幷貞陵半影燒之。 【태백산사고본】 11책 32권 23장 B면【국편영인본】 3책 28면 【분류】 역사-전사(前史) / 예술-미술(美術) //이 새끼가 방석의 엄마의 초상화도 불태우라고함.  *방석 = 세종의 애비한테 살해당한 왕세자 . 그 애비에 그 자식임. 정릉 (신덕왕후) 문서 토론 읽기 편집 역사 보기 도구 좌표: 북위 37° 36′ 5″ 동경 127° 0′ 7″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서울 정릉 (서울 貞陵)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의 사적 종목 사적 제208호 (1970년 5월 26일 지정) 면적 299,574m2 시대 조선시대 소유 문화재청 위치 서울 정릉은(는) 대한민국 안에 위치해 있다서울 정릉서울 정릉 서울 정릉 (대한민국)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2동 산87-16번지 좌표 북위 37° 36′ 5″ 동경 127° 0′ 7″ 정보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 정릉(貞陵)은 조선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神德王后)의 능으로 원래 정동(貞洞) 영국대사관 자리에 있었던 것을 태종 9년에 옮겼다. 사적 제208호로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에 있다. 개요 신덕왕후 강씨는 1356년에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 강윤성의 딸로 태어났다. 태...

삼국유사_원효의 특이한 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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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유사_원효의 특이한 사적 권 제4  >   제5 의해(義解第五)  >   원효불기 (元曉不羈 )  >   원효의 특이한 사적(0617년 (음)) 글자 작게 裟羅樹者諺云. 師之家夲住此谷西南, 母既娠而月滿適過此谷栗樹下, 忽分産而倉皇不能歸家, 且以夫衣掛樹而寢䖏其中, 因号樹曰裟羅樹. 其樹之實亦異於常至今稱裟羅栗. 古傳, 昔有主寺者給寺奴一人一夕饌栗二枚. 奴訟于官. 官吏怪之取栗撿之一枚盈一鉢. 乃皈判給一枚. 故因名栗谷. 師旣出家捨其宅爲寺名初開, 樹之旁置寺曰裟羅. 師之行状云是亰師人従祖考也, 唐僧傳云夲下湘州之人. 按麟徳二年間文武王割上州·下州之地置歃良州, 則下州乃今之昌寕郡也, 押梁郡夲下州之屬縣. 上州則今尚州亦作湘州也. 佛地村今屬慈仁縣, 則乃押梁之所分開也. 師生小名誓幢, 第名新幢. 幢者俗云毛也. 初母夢流星入懐因而有娠, 及将産有五色雲覆地. 真平王三十九年大業十三年丁丑歳也. 生而頴異學不従師. 其逰方始末弘通茂跡具載唐傳與行狀. 不可具載, 唯郷傳所記有一二叚異事. 師嘗一日風顛唱街云, “誰許没柯斧. 我斫支天柱.” 人皆未喻, 時太宗聞之曰, “此師殆欲得貴婦産賢子之謂爾. 國有大賢利莫大焉.” 時瑶石宫 今學院是也.有寡公主. 勑宫吏覔曉引入. 宫吏奉勑将求之, 已自南山来過蚊川橋 沙川, 俗云年川又蚊川, 又橋名榆橋也.遇之. 佯墮水中濕衣袴, 吏引師於宫裭衣曬㫰, 因留宿焉. 公主果有娠生薛聦. 聦生而睿敏愽通経史新羅十賢中一也. 以方音通㑹華夷方俗物名訓解六経文學, 至今海東業明絰者傳受不絶. 曉旣失戒生聦已後易俗服自号小姓居士. 偶得校勘 067優人舞弄大瓠其状瑰竒. 因其形製爲道具, 以華嚴経 ‘一切無㝵人一道出生死’, 命名曰無㝵仍作歌流于世. 嘗持此千村萬落且歌且舞化詠而歸, 使桑樞瓮牖玃猴之軰皆識佛陁之号, 咸作南無之稱曉之化大矣㦲. 其生縁之村名佛地, 寺名初開, 自稱元曉者蓋初輝佛日之意爾. 元曉亦是方言也, 當時人皆以郷言稱之始且校勘 068也. 曾住芬皇寺纂華嚴䟽, 至第四十迴向品終乃絶筆. 又嘗因訟分軀於百松, 故皆謂位階初地矣. 亦因海龍之誘承詔於路上...

삼국사기 신라본기 유리 이사금 통치 9년 _ 17관등을 제정하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유리 이사금 통치 9년 _ 17관등을 제정하다. 권 제1 신라본기 제1  >   유리(儒理) 이사금(尼師今)  >   9년 봄 17관등을 제정하다(0032년 (음)) 17관등을 제정하다 ( 32년 (음) ) 〔9년(32) 봄〕 또 관직을 두고 17개의 등급으로 하였다. 첫째는 이벌찬(伊伐飡)註 001이고, 둘째는 이척찬(伊尺飡)註 002이고, 셋째는 잡찬(迊飡)註 003이고, 넷째는 파진찬(波珍飡)註 004이고, 다섯째는 대아찬(大阿飡)註 005이고, 여섯째는 아찬(阿飡)註 006이고, 일곱째는 일길찬(一吉飡)註 007이고, 여덟째는 사찬(沙飡)註 008이고, 아홉째는 급벌찬(級伐飡)註 009이고, 열째는 대나마(大奈麻)註 010이고, 열한째는 나마(奈麻)註 011이고, 열두째는 대사(大舍)註 012이고, 열셋째는 소사(小舍)註 013이고, 열넷째는 길사(吉士)註 014이고, 열다섯째는 대오(大烏)註 015이고, 열여섯째는 소오(小烏)註 016이고, 열일곱째는 조위(造位)註 017이다. 又設官有十七䓁. 一伊伐飡, 二伊尺飡, 三迊飡, 四波珍飡, 五大阿飡, 六阿飡, 七一吉飡, 八沙飡, 九級伐飡, 十大奈麻, 十一奈麻, 十二大舎, 十三小舎, 十四吉士, 十五大鳥校勘 001, 十六小烏校勘 002, 十七造位. 연관콘텐츠    사료로 보는 한국사>삼국 시대>법률과 사회 풍속>가배와 회소곡 校勘 001 烏의 잘못이다. 校勘 002 烏의 잘못이다. 又設官有十七䓁. 一伊伐飡, 二伊尺飡, 三迊飡, 四波珍飡, 五大阿飡, 六阿飡, 七一吉飡, 八沙飡, 九級伐飡, 十大奈麻, 十一奈麻, 十二大舎, 十三小舎, 十四吉士, 十五大鳥 校勘  001 , 十六小烏 校勘  002 , 十七造位. 연관콘텐츠     사료로 보는 한국사>삼국 시대>법률과 사회 풍속>가배와 회소곡 校勘 001 烏의 잘못이다. 校勘 002 烏의 잘못이다....

삼국사기 견훤전_이찬 능환의 모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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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사기 견훤전_이찬 능환의 모반 권 제50 열전 제10  >   견훤(甄萱)  >   능환이 양검 등과 정변을 모의하다() 능환이 양검 등과 정변을 모의하다 견훤은 아내를 많이 취하여 아들이 10여 명이었다.註 001 넷째 아들 금강(金剛)註 002은 몸이 크고 지략이 많았다. 견훤이 특별히 그를 총애하여 그에게 왕위를 전해주려고 하였다. 그의 형들인 신검(神劒),註 003 양검(良劒),註 004 용검(龍劒)註 005 등이 이를 알고서 걱정하고 번민하였다. 당시 양검은 강주(康州)註 006도독(都督)註 007이었고, 용검은 무주(武州)註 008도독이었으며, 신검만이〔견훤의〕 곁에 있었다. 이찬(伊湌)註 009 능환(能奐)註 010이 사람을 강주, 무주 2주註 011에 보내 양검 등과 더불어 음모를 꾸몄다. 甄萱多娶妻, 有子十餘人. 第四子金剛, 身長而多智. 萱特愛之, 意欲傳其位. 其兄神劒·良劒·龍劒等知之, 憂悶. 時良劒爲康州都督, 龍劒爲武州都督, 獨神劒在側. 伊湌能奐使人徃康·武二州, 與良劒等隂謀. 註 001 견훤은 … 10여 명이었다: 『삼국유사』 권제2 기이제2 후백제 견훤조에 인용된 『이제가기(李磾家記)』에는 견훤과 상원부인(上院夫人) 사이에 8남 1녀가 있었다고 한다. 즉 장남은 신검〔견성(甄成)이라고도 함〕, 둘째는 태사(太師) 염뇌(謙腦), 셋째는 좌승(佐承) 용술(龍述), 넷째는 태사 총지(聰智), 다섯째는 대아간(大阿干) 종우(宗祐), 여섯째는 이름이 전하지 않으며, 일곱째는 좌승 위홍(位興), 여덟째는 태사 청구(靑丘)이고, 딸은 국내부인(國大夫人)이라고 하였다. 이들 중 신검 외에 그의 동생들이라고 하는 양검, 용검, 금강과 일치하는 이름은 찾을 수 없다. 註 002 금강(金剛): 견훤의 넷째 아들이다. 견훤이 그를 총애하여 왕위를 물려줄 뜻이 있자 그의 형들이 모의를 꾸며 935년 3월에 사람을 시켜 살해하였다. 금강과 신검을 동일인으로 여기는 견해도 있다(朴漢卨, 1...

삼국사기 견훤전 _ 신검이 크게 사면하고 교서를 발표하다 ( 935년 10월17일(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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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사기 견훤전 _ 신검이 크게 사면하고 교서를 발표하다 ( 935년 10월17일(음) ) [  " 국내에 크게 사면하였는데, 그 교서는 다음과 같다.註 001 “여의(如意)註 002가 총애를 입었으나 혜제(惠帝)註 003가 임금이 될 수 있었고, 건성(建成)註 004이 외람되게 태자의 자리에 있었으나 태종(太宗)註 005이 일어나 즉위하였으니, 천명은 바뀌지 않는 것이고, 왕위는 돌아갈 곳이 있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대왕〔견훤〕의 신과 같은 무예는 매우 걸출하였으며, 훌륭한 지략은 옛사람들을 뛰어넘었다. 태어나 쇠퇴해가는 말세를 만났으나 천하를 다스릴 것을 자임하였고, 삼한(三韓)註 006 땅을 차지하여 백제를 부흥하였다.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고통〕을 제거하니 백성들이 편안하게 되었고, 격려하여 용기를 북돋우기를 바람과 천둥처럼 하니 가까이와 멀리에서 준걸들이 달려와 큰 공로는 거의 거듭 일어나기에 가까워졌다. 지혜롭고 사려가 깊었으나 갑자기 한 번 실수하여 어린 아들이 사랑을 차지하니 간신들이 권력을 마음대로 하여 대왕[大君]을 진(晉) 혜제(惠帝)註 007의 어리석음으로 인도하였고, 어진 아버지를 헌공(獻公)註 008의 미혹에 빠지게 하여 왕위[大寶]를 어리석은 아이[頑童]에게 줄 뻔하였다. 다행스러운 것은 상제께서 진정한 마음을 내리시니 군자들이 허물을 고쳤고, 맏아들인 나에게 명하여 이 한 나라를 다스리게 하셨다는 점이다. 돌아다보건대〔나는〕왕위를 이을만한[震長]註 009 재목이 아니니 어찌 임금 자리에 나아갈 만한 지혜가 있겠는가? 조심스럽고 두려워 마치 얼음이 언 연못을 밟는 듯하다. 마땅히〔하늘의〕특별한 은혜[不次之恩]註 010를 생각하여 새로운 정치[惟新之政]註 011를 펼칠 것이니 국내에 대사면령을 내리는 것이 옳다. 청태 2년(935) 10월 17일 새벽 이전의 이미 발각된 것이나 아직 발각되지 않은 것, 이미 결정된 것이나 결정되지 않은 것 중에서 사형[大辟]註 012 이하의 죄는 모두 그것을 사면한다. 맡...

고려사 유금필전의 운주성 전투

  //고려사 유금필전 고려사 > 列傳 卷第五 > 諸臣 > 유금필 > 유금필이 운주 전투에서 승리하다 원문 국역글자 크게글자 작게이전 기사다음 기사출력 글자 크게글자 작게 유금필이 운주 전투에서 승리하다 十七年, 太祖自將征運州, 黔弼爲右將軍. 甄萱聞之, 簡甲士五千至曰, “兩軍相鬪, 勢不俱全, 恐無知之卒, 多被殺傷. 宜結和親, 各保封境.” 太祖會諸將議之, 黔弼曰, “今日之勢, 不容不戰. 願上觀臣等破敵, 勿憂也.” 遂乘萱未陣, 以勁騎數千, 突擊之, 斬獲三千餘級, 擒術士宗訓, 醫師訓謙, 勇將尙達·崔弼. 熊津以北三十餘城, 聞風自降. 색인어 이름太祖,黔弼,甄萱,太祖,黔弼,萱,宗訓,訓謙,尙達,崔弼 지명運州,熊津 관직右將軍 글자 크게글자 작게 유금필이 운주 전투에서 승리하다 〈태조〉 17년(934) 태조가 직접 운주(運州)를 치려 할 적에 유금필을 우장군(右將軍)으로 삼았다. 견훤이 그 소문을 듣고 뛰어난 병사 5,000명을 뽑아서 와서 말하기를, “양군이 맞서 싸우면 형세가 모두 온전하지 못할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병사들이 많이 죽거나 다칠까 염려되니 화친(和親)을 맺어 각각 봉토의 경계를 지키도록 하자.”라고 하였다. 태조가 여러 장수들을 모아 의논하였다. 유금필이 말하기를, “오늘의 형세는 싸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상께서는 신들이 적을 깨뜨리는 것을 보시고, 걱정하지 마시옵소서.”라고 하였다. 마침내 견훤이 아직 진영을 갖추지 못한 틈을 타 날랜 기병 수천 명으로 돌격하였다. 3,000여 급(級)을 베거나 사로잡았고, 술사(術士) 종훈(宗訓), 의사(醫師) 훈겸(訓謙), 용장(勇將) 상달(尙達)·최필(崔弼)을 포로로 잡았다. 웅진(熊津) 북쪽의 30여 성이 소문을 듣고 스스로 항복하였다.

세종실록 지리지의 '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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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실록 지리지의 '운주' 후삼국시대 운주성 전투 연구에 필요 사료_세종실록 지리지 세종실록 149권, 지리지 충청도 홍주목지리지 / 충청도 / 홍주목국역원문.원본 보기 지리지 / 충청도 / 홍주목 / 태안군 지리지 / 충청도 / 홍주목 / 서산군 지리지 / 충청도 / 홍주목 / 면천군 지리지 / 충청도 / 홍주목 / 해미현 지리지 / 충청도 / 홍주목 / 당진현 지리지 / 충청도 / 홍주목 / 덕산현 지리지 / 충청도 / 홍주목 / 예산현 지리지 / 충청도 / 홍주목 / 청양현 지리지 / 충청도 / 홍주목 / 보령현 지리지 / 충청도 / 홍주목 / 결성현 지리지 / 충청도 / 홍주목 / 대흥현 ⊙ 홍주목(洪州牧) 사(使) 1인, 판관(判官) 1인. 백제 때의 칭호(稱號)는 알 수 없다. 김씨[金富軾]의 지지(地志)에도 실리지 아니했고, 오직 《고려태조실록(高麗太祖實錄)》 10년 정해 3월에 왕이 운주(運州)에 들어갔다고 하였다. 【주(註)에 이르기를, "지금의 홍주(洪州)이다."고 하였다. 】 성종(成宗)을미196) 에 운주 도단련사(運州都團練使)를 두었고, 현종(顯宗)임자197) 에 단련사를 폐하고 지운주사(知運州事)로 고쳤다가, 뒤에 홍주로 고쳤다. 공민왕 7년 정유에 목(牧)으로 승격하였다가, 무신198) 에 지홍주사로 강등하고, 신해199) 에 다시 목(牧)으로 하였다. 본조에서도 그대로 따랐다. 별호는 안평(安平), 또는 해풍(海豐)이다. 【모두 순화(淳化) 때 정한 것이다. 】 속현(屬縣)이 5, 부곡(部曲)이 1, 소(所)가 1, 향(鄕)이 1이다. 신평현(新平縣)은 본래 백제의 사평현(沙平縣)인데, 신라에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혜성군(槥城郡)의 영현(領縣)을 삼았다. 여양현(黎陽縣)은 본래 백제의 사시량현(沙尸良縣)인데, 신라에서 신량현(新良縣)으로 고쳐 결성군(潔城郡)의 영현을 삼았고, 고려에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감무(監務)를 두었고, 본조 태조 4년 을해에 감무를 폐하여 홍주 임내로 하였다. 고구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