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_원효의 특이한 사적
삼국유사_원효의 특이한 사적
권 제4 > 제5 의해(義解第五) > 원효불기 (元曉不羈 ) > 원효의 특이한 사적(0617년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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裟羅樹者諺云. 師之家夲住此谷西南, 母既娠而月滿適過此谷栗樹下, 忽分産而倉皇不能歸家, 且以夫衣掛樹而寢䖏其中, 因号樹曰裟羅樹. 其樹之實亦異於常至今稱裟羅栗. 古傳, 昔有主寺者給寺奴一人一夕饌栗二枚. 奴訟于官. 官吏怪之取栗撿之一枚盈一鉢. 乃皈判給一枚. 故因名栗谷. 師旣出家捨其宅爲寺名初開, 樹之旁置寺曰裟羅. 師之行状云是亰師人従祖考也, 唐僧傳云夲下湘州之人. 按麟徳二年間文武王割上州·下州之地置歃良州, 則下州乃今之昌寕郡也, 押梁郡夲下州之屬縣. 上州則今尚州亦作湘州也. 佛地村今屬慈仁縣, 則乃押梁之所分開也. 師生小名誓幢, 第名新幢. 幢者俗云毛也. 初母夢流星入懐因而有娠, 及将産有五色雲覆地. 真平王三十九年大業十三年丁丑歳也. 生而頴異學不従師. 其逰方始末弘通茂跡具載唐傳與行狀. 不可具載, 唯郷傳所記有一二叚異事. 師嘗一日風顛唱街云, “誰許没柯斧. 我斫支天柱.” 人皆未喻, 時太宗聞之曰, “此師殆欲得貴婦産賢子之謂爾. 國有大賢利莫大焉.” 時瑶石宫 今學院是也.有寡公主. 勑宫吏覔曉引入. 宫吏奉勑将求之, 已自南山来過蚊川橋 沙川, 俗云年川又蚊川, 又橋名榆橋也.遇之. 佯墮水中濕衣袴, 吏引師於宫裭衣曬㫰, 因留宿焉. 公主果有娠生薛聦. 聦生而睿敏愽通経史新羅十賢中一也. 以方音通㑹華夷方俗物名訓解六経文學, 至今海東業明絰者傳受不絶. 曉旣失戒生聦已後易俗服自号小姓居士. 偶得校勘 067優人舞弄大瓠其状瑰竒. 因其形製爲道具, 以華嚴経 ‘一切無㝵人一道出生死’, 命名曰無㝵仍作歌流于世. 嘗持此千村萬落且歌且舞化詠而歸, 使桑樞瓮牖玃猴之軰皆識佛陁之号, 咸作南無之稱曉之化大矣㦲. 其生縁之村名佛地, 寺名初開, 自稱元曉者蓋初輝佛日之意爾. 元曉亦是方言也, 當時人皆以郷言稱之始且校勘 068也. 曾住芬皇寺纂華嚴䟽, 至第四十迴向品終乃絶筆. 又嘗因訟分軀於百松, 故皆謂位階初地矣. 亦因海龍之誘承詔於路上撰三昧経䟽, 置筆硯於牛之两角工校勘 069因謂之角乗, 亦表夲始二覺之微旨也. 大安法師排来而粘紙亦知音唱和也. 旣入寂, 聦碎遺骸塑真容安芬皇寺, 以表敬慕終天之志. 聦時旁禮像忽廻顧, 至今猶顧矣. 曉甞所居穴寺旁有聦家之墟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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校勘 067 서울대규장각본과 만송문고본은 판독이 어렵다.
校勘 068 旦의 오기로 보인다.
校勘 069 上의 오기로 보인다.
사라수에 관해서는 민간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성사의 집은 본래 이 골짜기의 서남쪽에 있었는데, 어머니가 아이를 가져 만삭이 되어 마침 이 골짜기 밤나무 밑을 지나다가 갑자기 해산하고 창황하여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우선 남편의 옷을 나무에 걸고 그 안에 누워 있었으므로 [그] 나무를 사라수라고 하였다. 그 나무의 열매도 보통 나무와는 달랐으므로 지금도 사라밤[裟羅栗]이라고 한다.註 200
예부터 전하기를, [사라사의] 주지가 절의 종 한 사람에게 하루 저녁의 끼니로 밤 두 개씩을 주었다. 종은 관가에 소송을 제기하였다. 이를 이상하게 생각한 관리가 [그] 밤을 가져다가 조사해보았더니 한 개가 바루 하나에 가득 찼다. 이에 도리어 한 개씩만 주라는 결정을 내렸다. 이 때문에 이름을 율곡이라고 하였다.
성사는 출가하고 나서 그의 집을 희사하여 절을 삼아 이름을 초개(初開)註 201라고 하고, 밤나무 옆에도 절을 지어 사라(裟羅)라고 하였다. 성사의 행장(行狀)에는 서울 사람이라고 했으나 [이것은] 할아버지를 따른 것이고, ≪당승전(唐僧傳)≫註 202에서는 본래 하상주(下湘州) 사람註 203이라고 하였다.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인덕(麟德)註 204 2년(665) 중에 문무왕(文武王)註 205이 상주(上州)註 206와 하주(下州)註 207의 땅을 나누어 삽량주(歃良州)註 208를 두었는데, 즉 하주는 지금의 창녕군(昌寧郡)이고, 압량군은 본래 하주의 속현이다. 상주는 곧 지금의 상주(尙州)註 209로 혹은 상주(湘州)라고도 한다. 불지촌은 지금의 자인현(慈仁縣)에 속해 있으니, 곧 압량군에서 나뉜 곳이다.註 210
성사가 나서 아명은 서당(誓幢)이고, 제명(第名)은 신당(新幢) 당(幢)은 속어로 털이다.이다. 처음에 어머니가 유성(流星)이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태기가 있었는데, 해산하려고 할 때는 오색구름이 땅을 덮었다. [곧] 진평왕(眞平王) 39년 대업(大業)註 211 13년 정축년(丁丑歲)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총명이 남달라 스승을 따라서 배우지 않았다. 그가 사방으로 다니며 수행한 시말(始末)과 널리 교화를 펼쳤던 크나큰 업적은 ≪당전(唐傳)≫과 행장에 자세히 실려 있다. 여기서는 자세히 기록 할 수 없고, 다만 향전(鄕傳)에 실린 한두 가지의 특이한 사적만을 쓴다.
성사는 일찍이 어느 날 상례에서 벗어나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기를,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허락하려는가?註 212 나는 하늘을 받칠 기둥을 다듬고자 한다.”고 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그] 뜻을 알지 못했는데, 이때 태종(太宗)이 그것을 듣고서 말하기를, “이 스님께서 아마도 귀부인을 얻어 훌륭한 아들을 낳고 싶어 하는구나. 나라에 큰 현인이 있으면 그보다 더한 이로움이 없을 것이다”고 하였다.
그때 요석궁(瑤石宮) 지금의 학원(學院)이 이곳이다.에 홀로 사는 공주가 있었다. 궁중의 관리를 시켜 원효를 찾아서 [궁중으로] 맞아들이게 하였다. 궁중의 관리가 칙명을 받들어 그를 찾으려고 하는데, 벌써 [그는] 남산(南山)註 213에서 내려와 문천교(蚊川橋) 사천(沙川)이나, 세간에서는 연천(年川) 또는 문천(蚊川)이라고 하고, 또 다리 이름을 유교(楡橋)註 214라고 한다.를 지나고 있어 만나게 되었다. [그는] 일부러 물에 떨어져 옷을 적셨다. 관리는 스님을 궁으로 인도하여 옷을 벗어 말리게 하니, 이 때문에 [그곳에서] 묵게 되었다. 공주가 과연 태기가 있어 설총(薛聰)을 낳았다.
설총은 나면서부터 명민하여 경서와 역사서에 두루 통달하니 신라 10현(十賢)註 215 중의 한 분이다. 우리말로써 중국과 외이의 각 지방 풍속과 물건 이름에 통달하고 6경(六經) 문학을 훈해하였으니,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경학을 공부하는 이들이 전수하여 끊이지 않는다.
원효가 이미 실계(失戒)하여 설총을 낳은 이후로는 속인의 옷으로 바꾸어 입고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라고 하였다. 우연히 광대들이 놀리는 큰 박을 얻었는데 그 모양이 괴이하였다. 그 모양대로 도구를 만들어 ≪화엄경(華嚴經)≫의 「일체 무애인(無㝵人)註 216은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난다」는 [문귀에서 따서] 이름을 무애(無㝵)라고 하고 노래를 지어 세상에 퍼뜨렸다. 일찍이 이것을 가지고 천촌만락(千村萬落)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하고 음영하여 돌아오니 가난하고 무지몽매한 무리들까지도 모두 부처의 호를 알게 되었고, 모두 나무(南舞)를 칭하게 되었으니 원효의 법화가 컸던 것이다.
그가 태어난 마을 이름을 불지(佛地)라고 하고, 절 이름을 초개(初開)라고 하며, 스스로 원효라고 부른 것은 대개 부처를 처음으로 빛나게 하였다(初輝佛日)는 뜻이다. 원효도 방언이니 당시 사람들은 모두 향언(鄕言)으로 그를 첫새벽이라고 불렀다.
일찍이 분황사(芬皇寺)註 217에 살면서 화엄소(華嚴疏)註 218를 짓다가 제4 십회향(十廻向) 품註 219에 이르자 마침내 붓을 놓았다. 또 일찍이 소송을 인해서 몸을 백 그루의 소나무註 220로 나누었으므로 모두 [그의] 위계(位階)를 초지(初地)註 221라고 하였다.
또 해룡(海龍)의 권유에 따라 길에서 조서를 받아 삼매경소(三昧經疏)註 222를 지으면서 붓과 벼루를 소의 두 뿔 위에 놓아두었으므로 이를 각승(角乘)註 223이라고 했는데, 또한 본각과 시각 두 각註 224의 숨은 뜻을 나타낸 것이다. 대안(大安)註 225법사가 배열하여 종이를 붙인 것임을 알고 화창한 것이다.
[성사께서] 입적하자 설총이 유해를 부수어 [그의] 진용(眞容)을 빚어 분황사에 봉안하고, 공경·사모하여 지극한 슬픔의 뜻을 표하였다. 설총이 그때 옆에서 예배를 하니 소상이 갑자기 돌아보았는데, 지금도 여전히 돌아본 채로 있다. 원효가 일찍이 살던 혈사(穴寺) 옆에 설총의 집터가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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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200
원효의 출생은 부처가 사라쌍수 아래에서 출생한 것에 비견되고 있다. 또한 불등을촌이 불지촌으로 불리고, 그 밤나무를 사라수라고 했던 것도 주목된다. 불지촌이라는 지명처럼 사라수도 원효의 탄생을 釋尊의 탄생과 같이 승화시키고자 했던 후대인들의 뜻이 투영되어 붙여진 이름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강인구 외, ≪역주 삼국유사≫ 4,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3, 120쪽).
註 201
경북 경산군에 있던 절이다.
註 202
贊寧이 찬한 ≪宋高僧傳≫을 말한다. 이 책의 권4에 원효전이 수록되어 있다.
註 203
원래는 下州의 압량군 출신이나 ≪속고승전≫ 당(唐) 新羅國 황룡사(皇龍寺) 元曉傳에서 원효를 湘州人이라고 한 것은 아마도 下州에 속해 있던 압량군을 상주의 치소 尙州(湘州)로 잘못 알았기 때문에 생긴 문제로 보는 견해가 있다(김상현, 「≪금강삼매경론≫의 연기설고」, ≪가산 이지관스님 화갑기념논총≫ 권상, 1992, 374쪽).
註 204
당나라 고종(高宗)의 연호로 664~665년까지 사용했다.
註 205
문무왕은 신라 30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661~681년이다. 자신의 형제들을 중시(中侍)에 임명하고 김유신을 상대등(上大等)과 태대각간(太大角干) 등에 중임함으로써 왕권의 안정을 꾀하고 주변에 많은 승려들을 두어 정신적 통일과 화합에 힘썼다(≪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5 문무왕).
註 206
신라 지방행정조직의 하나로 525년 진흥왕이 尙州에 軍主를 두고 上州를 설치하였다. 그 뒤 치소가 甘文州와 一善州로 이동하였다.
註 207
555년 진흥왕이 比斯伐에 설치하였으며 그 뒤 치소가 大耶와 押梁으로 이동하였다. 문무왕 때에 歃良州가 설치되면서 영역이 축소되었고, 신문왕 때에 完山州와 菁州가 신설되면서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註 208
삼국통일 직후에 완성된 9州의 하나로, 문무왕 때에 下州의 동쪽 지역인 梁山을 중심으로 설치되었다.
註 209
현재 경상북도 상주시 일대를 지칭하는데, 사벌국(沙伐國)이 신라에 복속된 뒤에 사벌주, 혹은 상주로 개편되었는데 소백산맥 이동 지역의 교통상의 요충지에 해당하는 곳으로 신라의 대외적 팽창의 전진기지 혹은 배후기지 역할을 수행한 지역이다(이용현, 「삼국시대의 상주 -중고기 신라 경영의 시점에서-」, ≪상주 영남 문물의 결절지≫, 2003, 국립대구박물관).
註 210
원효의 출생지에 대해서는 ≪宋高僧傳≫과 ≪삼국유사≫의 기록이 다소 차이를 보인다. 이에 대해 일연은 본 조를 통해 ≪송고승전≫의 오류를 지적하여 잘못된 부분은 세밀하게 고증한 뒤 분명히 밝히고, 또 所傳이 다른 경우에는 분명히 병기하는 등 매우 신중히 다루었다. 이에 대해서 원효의 행장에 그가 京師人(王京人)이라고 나온 것은 祖考의 本居를 따른 것이었다고 하며, 한편으로 당승전에서 본래 下湘州人(押梁郡人)이었다고 한 것은 ‘祖考’를 ‘먼 조상’으로 해석할 경우에 원효의 선조는 왕경인이었다는 것이며 그의 속성이 설씨인 것으로 보아 그 중에서도 習比部 출신이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원효의 遠祖가 어떤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압량군에 파견된 후 그곳에 정착했거나 국가시책에 따라 그 곳으로 이주되었을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전미희, 「원효의 신분과 그의 활동」, ≪한국사연구≫ 63, 1988, 72~74쪽).
註 211
수(隋) 煬帝의 연호로 605년~617년에 사용하였다.
註 212
여성의 생식기를 상징하며 이 노래에서 괴승의 면모가 있고 파계승의 암시이다(김원중, ≪삼국유사≫, 을유문화사, 2004, 458쪽).
註 213
경상북도 경주시 남쪽에 위치한 산으로 북쪽의 금오봉(金鰲峰)과 남쪽의 고위봉(高位峰) 두 봉우리에서 흘러내리는 60여 개의 계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註 214
楡는 느릅나무. 이 다리가 느릅나무로 되어 楡敎라고 한 듯하다.
註 215
薛聰, 崔承祐, 崔彦撝, 金大問, 朴仁範, 元傑, 巨仁, 金雲卿, 金乘訓, 崔致遠 등을 말한다.
註 216
장애가 없다는 말이다. 즉 모든 외부의 장애를 받지 않는 자유로운 것을 말한다.
註 217
선덕여왕 3년(634) 정월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경주시내의 황룡사지 북쪽에 있다.
註 218
≪華嚴經≫의 주석.
註 219
제40회향은 불교의 보살 수행 52단계 중에서 40번째 단계를 말하는 것이요, ‘品’은 불경에서 일반 서적의 편과 같은 의미이다.
註 220
육신이 변화하여 100그루의 소나무에 몸을 나누었다는 것. 보살수행의 단계에서 제41위에서 50위까지를 10地라고 하며 10지 중의 첫 번째인 歡喜地를 初地라 한다. 10信에서 10回向까지는 범부이며, 초지 이상부터 성자의 위치에 들어간다. 화엄경 십지품에 ‘이 보살이 … 가정과 처자와 五慾을 버리고 출가하여 근행정진하면 … 능히 百法門에 들어갈 수 있으며, 능히 몸을 100으로 변화시킬 수 있으니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 중 맨 끝에 보이는 능히 몸을 100으로 변화시킨다고 한 것이 ≪삼국유사≫에 언급된 내용이다. 즉 초지인 환희지의 보살은 그 몸을 100개의 몸으로 변하시킬 수 있으므로 원효는 초지의 보살 즉 성인의 경지에 올랐다는 의미이다(김영태, ≪전기와 설화를 통해 본 원효연구≫).
註 221
보살이 수행하는 계위인 527위 중 10地位의 첫 계단. 즉 歡喜地를 말한다.
註 222
삼매경이란 ≪金剛三昧經≫을 의미한다. 그 내용은 부처님이 영축산에서 금강삼매에 들어 일승의 진실한 법을 설한 것을 말한다. 금강삼매경소는 원효가 금강삼매경을 해석한 것으로 원효의 사상은 크게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대별된다. 첫째는 中觀과 唯識사상의 화쟁적 종합이며, 둘째는 大乘禪 사상의 천명이고, 셋째는 眞俗不二의 대중불교 지향이다. 이 세 가지의 근본 원리는 本覺, 始覺을 중심으로 하는 覺 사상이다.
註 223
覺과 角이 음이 같기 때문에 소의 두 角으로써 二角을 표시한 것이다. 乘은 불법을 말한다.
註 224
본각과 시각. 자각과 타각. 본각은 온갖 유정·무정에 통한 자성의 본체로서 갖추어 있는 如來藏眞如 곧 우주 법계의 근본 본체인 진여의 異體이다. 시각은 곧 일체 有情·無情에 통하여 그 자성 본체로서 갖추어 있는 여래장진여에 대하여 도로 그 본각이 수행의 공을 가자하여 覺證한 각을 말한다. 그러므로 본각과 시각이 실체는 다르지 아니하나 다만 지위가 같이 낳으므로 본각 또는 시각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註 225
언제나 저자거리에서 구리로 만든 바라를 치면서 ‘大安 大安’하고 소리치며 노래했으므로 이같은 號가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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