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견훤전_이찬 능환의 모반
삼국사기 견훤전_이찬 능환의 모반
권 제50 열전 제10 > 견훤(甄萱) > 능환이 양검 등과 정변을 모의하다()
능환이 양검 등과 정변을 모의하다
견훤은 아내를 많이 취하여 아들이 10여 명이었다.註 001 넷째 아들 금강(金剛)註 002은 몸이 크고 지략이 많았다. 견훤이 특별히 그를 총애하여 그에게 왕위를 전해주려고 하였다. 그의 형들인 신검(神劒),註 003 양검(良劒),註 004 용검(龍劒)註 005 등이 이를 알고서 걱정하고 번민하였다. 당시 양검은 강주(康州)註 006도독(都督)註 007이었고, 용검은 무주(武州)註 008도독이었으며, 신검만이〔견훤의〕 곁에 있었다. 이찬(伊湌)註 009 능환(能奐)註 010이 사람을 강주, 무주 2주註 011에 보내 양검 등과 더불어 음모를 꾸몄다.
甄萱多娶妻, 有子十餘人. 第四子金剛, 身長而多智. 萱特愛之, 意欲傳其位. 其兄神劒·良劒·龍劒等知之, 憂悶. 時良劒爲康州都督, 龍劒爲武州都督, 獨神劒在側. 伊湌能奐使人徃康·武二州, 與良劒等隂謀.
註 001
견훤은 … 10여 명이었다: 『삼국유사』 권제2 기이제2 후백제 견훤조에 인용된 『이제가기(李磾家記)』에는 견훤과 상원부인(上院夫人) 사이에 8남 1녀가 있었다고 한다. 즉 장남은 신검〔견성(甄成)이라고도 함〕, 둘째는 태사(太師) 염뇌(謙腦), 셋째는 좌승(佐承) 용술(龍述), 넷째는 태사 총지(聰智), 다섯째는 대아간(大阿干) 종우(宗祐), 여섯째는 이름이 전하지 않으며, 일곱째는 좌승 위홍(位興), 여덟째는 태사 청구(靑丘)이고, 딸은 국내부인(國大夫人)이라고 하였다. 이들 중 신검 외에 그의 동생들이라고 하는 양검, 용검, 금강과 일치하는 이름은 찾을 수 없다.
註 002
금강(金剛): 견훤의 넷째 아들이다. 견훤이 그를 총애하여 왕위를 물려줄 뜻이 있자 그의 형들이 모의를 꾸며 935년 3월에 사람을 시켜 살해하였다. 금강과 신검을 동일인으로 여기는 견해도 있다(朴漢卨, 1973). 하지만 그렇게 보기는 어려운 것이 아닌가 한다(申虎澈, 1991; 1993, 212~214쪽).
〈참고문헌〉
朴漢卨, 1973, 「後百濟 金剛에 關하여」, 『大丘史學』 7·8
申虎澈, 1991, 「後百濟와 관련된 여러 이설들의 종합적 검토」, 『國史館論叢』 29; 1993, 「甄萱關係 諸異說의 검토」, 『後百濟 甄萱政權硏究』, 一潮閣
註 003
신검(神劒): 견훤의 첫째 아들로서 아버지를 몰아내고 후백제 제2대 왕이 되었다. 재위 935∼936년. 본 열전 동광 2년(924) 가을 7월조 및 『고려사』 권1 세가1 태조 7년(924) 7월조에 조물군을 공격하였다는 수미강(須彌康 혹은 須彌强)은 신검과 동일인으로 여겨진다(朴漢卨, 1973, 「後百濟 金剛에 關하여」, 『大丘史學』 7·8). 이에 그가 일찍부터 지휘관으로 활약하였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사』 권92 열전5 제신 유금필전에 따르면 933년에는 ‘통군(統軍. 이를 총군이라고 한 것은 잘못인 듯)’으로서 군사를 이끌고 신라의 금성 부근에서 군사 활동을 펴다가 유금필에게 패하였다고 한다. 936년 9월 일리천 전투에서 왕건에게 크게 패하였고, 결국 항복하였다. 이로써 후백제는 멸망하였다. 왕건은 그가 정변을 주도하지 않았고, 또 항복하였다는 이유로 그를 죽이지 않고 관직을 내렸다고 한다. 양검, 용검 등 두 동생과 함께 형벌을 받아 죽임을 당했다는 설도 있거니와, 그의 최후는 잘 알 수 없다. 본 열전 천복(天福) 원년(936) 9월조 및 『고려사』 권2 세가2 태조 19년(936) 9월조 참고.
註 004
양검(良劒): 견훤의 둘째 아들. 『고려사』 권1 세가1 태조 7년(924) 7월조에 따르면 이때 신검으로 추정되는 수미강과 함께 조물군 공격에 참여하였다. 그가 일찍부터 지휘관으로 활약하였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후백제 멸망 후 유배되었다가 죽음을 당하였다고 한다. 본 열전 천복(天福) 원년(936) 9월조 및 『고려사』권2 세가2 태조 19년(936) 9월조 참고.
註 005
용검(龍劒): 견훤의 셋째 아들. 후백제 멸망 후 유배되었다가 죽음을 당하였다고 한다. 본 열전 천복(天福) 원년(936) 9월조 및 『고려사』 권2 세가2 태조 19년(936) 9월조 참고.
註 006
강주(康州): 신라 9주의 하나로 신문왕 5년(685)에 설치되었고, 본래 명칭은 청주(菁州)였다가 경덕왕대에 강주로 바뀌었다[본서 권제34 잡지제3 지리1 신라 강주]. 대체로 지금의 경상남도 서부 지역을 관할하였다. 그 치소는 지금의 경상남도 진주시 일대이다.
註 007
도독(都督): 본서 권제40 잡지제9 외관(外官)조에는 원성왕 원년(785)에 9주(州)의 장관을 도독이라고 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본 열전에 나오듯이 견훤은 ‘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라고 자서하였다. 이를 보면 여기에서의 도독은 ‘지절도독’을 차용한 것으로도 볼 여지가 있다.
註 008
무주(武州): 신라 9주의 하나로 신문왕 6년(686)에 무진주로 삼았으며, 경덕왕대에 무주로 바뀌었다[본서 권제36 잡지제5 지리3 신라 무주]. 대체로 지금의 전라남도 지역을 관할하였다. 그 치소는 지금의 광주광역시 일대이다.
註 009
이찬(伊湌): 신라 17관등 중 제2관등이다. 자세한 설명은 본서 권제1 신라본기제1 유리이사금 9년(32)조의 주석 참조.
註 010
능환(能奐): 정변의 책사였으며, 후백제 멸망 후 왕건은 정변 모의의 책임을 물어 그를 죽였다고 한다. 본 열전 천복(天福) 원년(936) 9월조 및 『고려사』 권2 세가2 태조 19년(936) 9월조 참고.
註 011
강주, 무주 2주: 여기에서의 강주, 무주는 광역의 강주, 무주가 아니라 그 치소인 강주(지금의 경상남도 진주시 일대), 무주(지금의 광주광역시 일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