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동이전 고구려편_신대왕 백고와 산상왕 이이모와 고국천왕 발기

 삼국지 동이전 고구려편_신대왕 백고와 산상왕 이이모와 고국천왕 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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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宮이 죽고 그 아들 백고伯固가 왕王이 되었다.註 092 

순제順帝와 환제桓帝 연간에 다시 요동군遼東郡을 침공하여 

신안新安과 거향居鄕을 노략질하고, 또 서안평西安平을 공격하여 도중에서 

대방령帶方令을 죽이고 낙랑태수樂浪太守의 처자妻子를 포로로 사로잡았다.

영제靈帝의 건녕建寧 2년(A.D.169; 고구려高句麗 신대왕新大王 5)에 

현토태수玄菟太守 경림耿臨이 그들을 토벌하여 수 백 명을 죽이고 사로잡으니, 

백고伯固가 항복하여 요동遼東에 속하였다.

희평熹平 연간(A.D.172~177; 고구려高句麗 신대왕新大王 8~13)에 

백고伯固는 현토군玄菟郡에 속하기를 청하였다.註 093 

공손도公孫度註 094의 세력이 요동遼東에 웅거하자, 

백고伯固는 대가大加 우거優居와 주부主簿 연인然人 등을 파견하여 

[공손公孫]도度를 도와 부산富山註 095의 도적을 격파하였다.

백고伯固가 죽고 두 아들이 있었는데, 큰 아들은 발기拔奇, 작은 아들은 이이모伊夷模였다. 

발기拔奇는 어질지 못하여, 국인國人들이 함께 이이모伊夷模를 옹립하여 

왕王으로 삼았다.註 096 

백고伯固 때부터 [고구려는] 자주 요동遼東을 노략질하였고, 또 류망流亡한 

호胡[족族] 5백여호戶를 받아들였다.


○ 宮死, 子伯固立校勘 050註 092范書, 宮死, 子遂成立, 遂成死, 子伯固立. 丁謙曰, 朝鮮史載, 宮年老, 讓位於弟遂成, 稱次大王. 以暴戾, 爲國人所弑. 因立其弟伯國, 稱新大王, 卽傳中伯固. 傳言, 宮死, 子伯固立, 不獨脫卻遂成, 而以弟爲子, 亦誤. 弼按下文, 位宮, 爲宮之曾孫, 則伯固, 爲宮之子, 其世系不誤. 然與范書及朝鮮史, 均不合. 又按, 惠棟曰, 蔡邕集云, 東夷高句驪翮子伯固, 逆謀並發. 亦可爲遂成被弑之證. 順·桓之間, 復犯遼東, 寇新安·居鄕, 郝經續後漢書, 居, 作民. 又攻西安平, 于道上殺帶方令, 略得樂浪太守妻子. 范書, 順帝, 陽嘉元年, 置玄菟郡屯田六部. 質桓之間, 復犯遼東西安平, 殺帶方令, 掠得樂浪太守妻子. 郡國志, 帶方, 屬樂浪郡. 一統志, 帶方故城, 今平壤南境. 靈帝 建寧二年, 玄菟太守耿臨討之, 斬首虜數百級, 伯固降, 屬遼東. (嘉)[熹]校勘 051平中, 此敍靈帝時事, 當作熹平. 伯固乞屬玄菟.註 093 公孫度註 094之雄海東也, 伯固遣校勘 052加優居·主簿然人等 馮本, 大作犬. 助度擊富山註 095賊, 破之.
伯固死, 有二子, 長子拔奇, 小子伊夷模. 拔奇不肖, 國人便共立伊夷模爲王.註 096 自伯固時, 數寇遼東, 又受亡胡五百餘家.

○ 宮死, 子伯固立校勘 050註 092. 范書, 宮死, 子遂成立, 遂成死, 子伯固立. 丁謙曰, 朝鮮史載, 宮年老, 讓位於弟遂成, 稱次大王. 以暴戾, 爲國人所弑. 因立其弟伯國, 稱新大王, 卽傳中伯固. 傳言, 宮死, 子伯固立, 不獨脫卻遂成, 而以弟爲子, 亦誤. 弼按下文, 位宮, 爲宮之曾孫, 則伯固, 爲宮之子, 其世系不誤. 然與范書及朝鮮史, 均不合. 又按, 惠棟曰, 蔡邕集云, 東夷高句驪翮子伯固, 逆謀並發. 亦可爲遂成被弑之證. 順·桓之間, 復犯遼東, 寇新安·居鄕, 郝經續後漢書, 居, 作民. 又攻西安平, 于道上殺帶方令, 略得樂浪太守妻子. 范書, 順帝, 陽嘉元年, 置玄菟郡屯田六部. 質桓之間, 復犯遼東西安平, 殺帶方令, 掠得樂浪太守妻子. 郡國志, 帶方, 屬樂浪郡. 一統志, 帶方故城, 今平壤南境. 靈帝 建寧二年, 玄菟太守耿臨討之, 斬首虜數百級, 伯固降, 屬遼東. (嘉)[熹]校勘 051平中, 此敍靈帝時事, 當作熹平. 伯固乞屬玄菟.註 093 公孫度註 094之雄海東也, 伯固遣大校勘 052加優居·主簿然人等 馮本, 大作犬. 助度擊富山註 095賊, 破之.

伯固死, 有二子, 長子拔奇, 小子伊夷模. 拔奇不肖, 國人便共立伊夷模爲王.註 096 自伯固時, 數寇遼東, 又受亡胡五百餘家.


註 092 宮死 子伯固立 : 伯固는 高句麗의 제8대 新大王이다. 『三國史記』「高句麗本紀」에는 ‘諱伯固 固作句 大祖大王之季弟’라 되어 있어『三國志』의 기록과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즉, 『三國史記』에는 太祖王의 季弟로 되어 있는데『三國志』에는 아들로 되어 있다. 『後漢書』高句驪傳과도 차이가 있다.

太祖王 이후의 高句麗王系에 대해선 3書가 각기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圖解하면 다음과 같다.


여기에서 伯固를 宮의 아들이라 한『三國志』의 기록이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宮과 遂成 및 伯固의 왕위계승 관계는 『後漢書』에 기록된 父子關係에 의한 것이 아니라『三國史記』所傳에 따라 兄弟關係에 의한 것으로 봄이 타당하다.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6「高句麗本紀」4 故國川王 即位年條·山上王 即位年條.

『後漢書』卷85「東夷列傳」高句驪條.

註 093 屬遼東 熹平中 伯固乞屬玄菟 : 高句麗가 遼東郡 또는 玄菟郡에 屬하는 것은 고구려와 漢과의 交涉을 주관하는 郡이 어디이냐 하는 것을 의미한다. 伯固가 玄菟郡에 속하기를 요청했다는 것은 지리적으로 玄菟郡이 高句麗에 가깝고 또 그 郡의 勢力이 미약하므로 對漢交涉窓口에 유리하다고 판단해서인 듯 하다.

註 094 公孫度 : 遼東郡 襄平 출신. 처음 玄菟郡의 郡吏가 되었다가 중앙에 遷擧되어 尙書郞을 역임하고, 董卓의 집권기에 遼東太守에 제수되었다. 公孫度은 黃巾亂 이후 중국이 혼란에 빠졌음을 헤아려 스스로 自立의 勢를 굳혀 나갔다. 遼東郡을 나누어 遼西郡과 中遼郡을 설치하고 太守를 두었으며, 渤海灣을 건너 山東半島의 東萊諸縣을 귀복시키어 營州刺史를 설치하였다. 스스로 遼東侯 平州牧이 되어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였다. 平州의 명칭은 이 때 처음 나타난다. 그의 死後 아들인 公孫康이 계승하였다. (『三國志』卷8 公孫度傳 참조)

註 095 富山 : 廣開土大王陵碑에 永樂 5年 乙未의 大王이 碑麗(契丹族의 一部族)에 대한 親征때에 富山을 거쳤음이 기술되어 있다. 그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요동지역의 撫順市 동쪽의 어느 곳으로 여겨진다.

註 096 國人便共立伊夷模爲王 : 『三國史記』에 의하면 新大王 伯固에 이어 그 아들인 男武(故國川王)가 즉위하였으며, 故國川王이 後嗣가 없이 죽자 그 동생들인 發岐와 延優 사이에 王位를 둘러싼 紛爭이 있었는데, 故國川王의 妃인 于氏의 지원을 받은 延優가 승리하여 王(山上王)이 되었다고 하였다. 이는『三國志』의 기록과 차이가 난다. 이에『三國史記』의 底本이 되었던『海東古記』와 같은 우리측의 在來의 傳承과『三國志』의 기록 간의 차이를 조정해보려는 시도로서, 『三國史記』의 撰者는『海東古記』와 같은 在來의 傳承을 그대로 살리고 여기에다가『三國志』의 기록을 揷入하는 편법을 취하였다. 그리하여『三國志』에선 故國川王의 存在가 빠졌으므로 자연『三國志』에서 전하는 사건과 王名을『三國史記』所傳에 一代씩 소급해서 附加케 되어진다. 즉, 伊夷模(山上王)와 發岐 간의 분쟁에 관한『三國志』의 기사가 故國川王 即位條에 揷入되어졌고, 故國川王의 이름은 男武인데 덧붙여 ‘或云伊夷謨’라고 하는 記事도 揷入케 되었다.

그렇게되니 형제 간의 왕위계승분쟁이 故國川王 즉위 때와 山上王 즉위 때에 두차례 있었던 것처럼 되었다. 이는 兩側 傳承을 합쳐보려는 苦肉之策에서 나온 것이나 문제는 故國川王의 實在를 인정하느냐에 있다. 이를 架空의 王이라는 견해도 있었으나, 이 王의 實在를 부정할 수는 없다. ‘拔奇와 伊夷模’는 ‘發岐와 延優’와 同一한 人名으로 이들은 故國川王 死後에 王位繼承紛爭을 벌려 延優 즉, 伊夷模가 승리해 王位에 즉위한다. 山上王과 그의 兄嫂인 故國川王 妃 于氏와의 결합은 그 때까지 고구려 사회에 널리 행해져 오던 娶嫂婚의 구체적인 한 例이다.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6「高句麗本紀」4 故國川王·山上王條.

盧泰敦, 「高句麗초기의 娶嫂婚에 관한 一考察」『金哲埈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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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宮死, 子伯固立校勘 050註 092. 范書, 宮死, 子遂成立, 遂成死, 子伯固立. 丁謙曰, 朝鮮史載, 宮年老, 讓位於弟遂成, 稱次大王. 以暴戾, 爲國人所弑. 因立其弟伯國, 稱新大王, 卽傳中伯固. 傳言, 宮死, 子伯固立, 不獨脫卻遂成, 而以弟爲子, 亦誤. 弼按下文, 位宮, 爲宮之曾孫, 則伯固, 爲宮之子, 其世系不誤. 然與范書及朝鮮史, 均不合. 又按, 惠棟曰, 蔡邕集云, 東夷高句驪翮子伯固, 逆謀並發. 亦可爲遂成被弑之證. 順·桓之間, 復犯遼東, 寇新安·居鄕, 郝經續後漢書, 居, 作民. 又攻西安平, 于道上殺帶方令, 略得樂浪太守妻子. 范書, 順帝, 陽嘉元年, 置玄菟郡屯田六部. 質桓之間, 復犯遼東西安平, 殺帶方令, 掠得樂浪太守妻子. 郡國志, 帶方, 屬樂浪郡. 一統志, 帶方故城, 今平壤南境. 靈帝 建寧二年, 玄菟太守耿臨討之, 斬首虜數百級, 伯固降, 屬遼東. (嘉)[熹]校勘 051平中, 此敍靈帝時事, 當作熹平. 伯固乞屬玄菟.註 093 公孫度註 094之雄海東也, 伯固遣大校勘 052加優居·主簿然人等 馮本, 大作犬. 助度擊富山註 095賊, 破之.

伯固死, 有二子, 長子拔奇, 小子伊夷模. 拔奇不肖, 國人便共立伊夷模爲王.註 096 自伯固時, 數寇遼東, 又受亡胡五百餘家.


校勘 050 『後漢書』에는 ‘宮死子遂成立’ 또 ‘遂成死子伯固立’으로 되어 있다.

校勘 051 諸本에는 ‘嘉’로 되어 있다. 盧弼은 이것은 靈帝時의 事件을 기록한 것이니 ‘熹平’으로 해야 된다고 하였다. 이에 盧弼의 주장을 따라 ‘熹’로 고쳐 잡는다.

校勘 052 「南本」에는 ‘犬’으로 되어 있다.

註 092 宮死 子伯固立 : 伯固는 高句麗의 제8대 新大王이다. 『三國史記』「高句麗本紀」에는 ‘諱伯固 固作句 大祖大王之季弟’라 되어 있어『三國志』의 기록과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즉, 『三國史記』에는 太祖王의 季弟로 되어 있는데『三國志』에는 아들로 되어 있다. 『後漢書』高句驪傳과도 차이가 있다.

太祖王 이후의 高句麗王系에 대해선 3書가 각기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圖解하면 다음과 같다.


여기에서 伯固를 宮의 아들이라 한『三國志』의 기록이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宮과 遂成 및 伯固의 왕위계승 관계는 『後漢書』에 기록된 父子關係에 의한 것이 아니라『三國史記』所傳에 따라 兄弟關係에 의한 것으로 봄이 타당하다.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6「高句麗本紀」4 故國川王 即位年條·山上王 即位年條.

『後漢書』卷85「東夷列傳」高句驪條.

註 093 屬遼東 熹平中 伯固乞屬玄菟 : 高句麗가 遼東郡 또는 玄菟郡에 屬하는 것은 고구려와 漢과의 交涉을 주관하는 郡이 어디이냐 하는 것을 의미한다. 伯固가 玄菟郡에 속하기를 요청했다는 것은 지리적으로 玄菟郡이 高句麗에 가깝고 또 그 郡의 勢力이 미약하므로 對漢交涉窓口에 유리하다고 판단해서인 듯 하다.

註 094 公孫度 : 遼東郡 襄平 출신. 처음 玄菟郡의 郡吏가 되었다가 중앙에 遷擧되어 尙書郞을 역임하고, 董卓의 집권기에 遼東太守에 제수되었다. 公孫度은 黃巾亂 이후 중국이 혼란에 빠졌음을 헤아려 스스로 自立의 勢를 굳혀 나갔다. 遼東郡을 나누어 遼西郡과 中遼郡을 설치하고 太守를 두었으며, 渤海灣을 건너 山東半島의 東萊諸縣을 귀복시키어 營州刺史를 설치하였다. 스스로 遼東侯 平州牧이 되어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였다. 平州의 명칭은 이 때 처음 나타난다. 그의 死後 아들인 公孫康이 계승하였다. (『三國志』卷8 公孫度傳 참조)

註 095 富山 : 廣開土大王陵碑에 永樂 5年 乙未의 大王이 碑麗(契丹族의 一部族)에 대한 親征때에 富山을 거쳤음이 기술되어 있다. 그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요동지역의 撫順市 동쪽의 어느 곳으로 여겨진다.

註 096 國人便共立伊夷模爲王 : 『三國史記』에 의하면 新大王 伯固에 이어 그 아들인 男武(故國川王)가 즉위하였으며, 故國川王이 後嗣가 없이 죽자 그 동생들인 發岐와 延優 사이에 王位를 둘러싼 紛爭이 있었는데, 故國川王의 妃인 于氏의 지원을 받은 延優가 승리하여 王(山上王)이 되었다고 하였다. 이는『三國志』의 기록과 차이가 난다. 이에『三國史記』의 底本이 되었던『海東古記』와 같은 우리측의 在來의 傳承과『三國志』의 기록 간의 차이를 조정해보려는 시도로서, 『三國史記』의 撰者는『海東古記』와 같은 在來의 傳承을 그대로 살리고 여기에다가『三國志』의 기록을 揷入하는 편법을 취하였다. 그리하여『三國志』에선 故國川王의 存在가 빠졌으므로 자연『三國志』에서 전하는 사건과 王名을『三國史記』所傳에 一代씩 소급해서 附加케 되어진다. 즉, 伊夷模(山上王)와 發岐 간의 분쟁에 관한『三國志』의 기사가 故國川王 即位條에 揷入되어졌고, 故國川王의 이름은 男武인데 덧붙여 ‘或云伊夷謨’라고 하는 記事도 揷入케 되었다.

그렇게되니 형제 간의 왕위계승분쟁이 故國川王 즉위 때와 山上王 즉위 때에 두차례 있었던 것처럼 되었다. 이는 兩側 傳承을 합쳐보려는 苦肉之策에서 나온 것이나 문제는 故國川王의 實在를 인정하느냐에 있다. 이를 架空의 王이라는 견해도 있었으나, 이 王의 實在를 부정할 수는 없다. ‘拔奇와 伊夷模’는 ‘發岐와 延優’와 同一한 人名으로 이들은 故國川王 死後에 王位繼承紛爭을 벌려 延優 즉, 伊夷模가 승리해 王位에 즉위한다. 山上王과 그의 兄嫂인 故國川王 妃 于氏와의 결합은 그 때까지 고구려 사회에 널리 행해져 오던 娶嫂婚의 구체적인 한 例이다.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6「高句麗本紀」4 故國川王·山上王條.

盧泰敦, 「高句麗초기의 娶嫂婚에 관한 一考察」『金哲埈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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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建安 연간(A.D.196~219; 高句麗 故國川王 18~山上王 23) 에 公孫康註 097이 군대를 보내어 고구려를 공격하여 격파하고 읍락을 불태웠다. 拔奇는 兄이면서도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涓奴部의 [大]加와 함께 각기 下戶 3만명을 이끌고 [公孫]康에게 투항하였다가 돌아와서 沸流水 유역에 옮겨 살았다. [지난 날] 항복했던 胡[族]도 伊夷模를 배반하므로 伊夷模는 새로 나라를 세웠는데註 098 오늘날 [고구려가] 있는 곳이 이곳이다. 拔奇는 드디어 遼東으로 건너가고,註 099 그 아들은 [高]句麗에 계속 머물렀는데, 지금 古雛加 駮位居가 바로 그 사람이다. 그 뒤에 다시 玄菟를 공격하므로 玄菟郡과 遼東郡이 힘을 합쳐 [고구려에] 반격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 建安(196~220)中, 公孫康註 097出軍擊之, 破其國, 焚燒邑落. 拔奇怨爲兄而不得立, 與涓奴加各將下戶三萬餘口詣康降, 還住沸流水. 降胡亦叛伊夷模, 伊夷模更作新國,註 098 今日所在是也. 丁謙曰, 伯固次子, 伊夷模, 東藩紀要云, 名男武, 稱故國川王. 伊夷模子, 位宮, 紀要云, 稱東川王. 惟東川未立以前, 尙有山上王, 名延優, 爲伊夷模弟. 立於建安二年, 在位幾五十年, 東川王始立. 此, 又脫漏. 且攷, 位宮, 乃太祖王宮孫, 並非曾孫. 又攷, 位宮, 爲毋丘儉所破, 始移都平壤. 朝鮮史與東藩紀要, 所載皆同. 作新國者, 指山上王, 築丸都山城之事. 吳其昌曰, 高麗國都, 在晋以前, 位於今日鴨綠江北岸奉天境內輯安懷仁附近. 劉宋以後, 始南移今日之平壤. 吳說, 已略見前. 詳見北平圖書館月刊. 姚範曰, 今日云云, 疑循舊文. 拔奇遂往遼東,註 099 有子留句麗國, 今古雛加駮位居是也. 其後復擊玄菟, 玄菟與遼東合擊, 大破之.


○ 建安(196~220)中, 公孫康註 097出軍擊之, 破其國, 焚燒邑落. 拔奇怨爲兄而不得立, 與涓奴加各將下戶三萬餘口詣康降, 還住沸流水. 降胡亦叛伊夷模, 伊夷模更作新國,註 098 今日所在是也. 丁謙曰, 伯固次子, 伊夷模, 東藩紀要云, 名男武, 稱故國川王. 伊夷模子, 位宮, 紀要云, 稱東川王. 惟東川未立以前, 尙有山上王, 名延優, 爲伊夷模弟. 立於建安二年, 在位幾五十年, 東川王始立. 此, 又脫漏. 且攷, 位宮, 乃太祖王宮孫, 並非曾孫. 又攷, 位宮, 爲毋丘儉所破, 始移都平壤. 朝鮮史與東藩紀要, 所載皆同. 作新國者, 指山上王, 築丸都山城之事. 吳其昌曰, 高麗國都, 在晋以前, 位於今日鴨綠江北岸奉天境內輯安懷仁附近. 劉宋以後, 始南移今日之平壤. 吳說, 已略見前. 詳見北平圖書館月刊. 姚範曰, 今日云云, 疑循舊文. 拔奇遂往遼東,註 099 有子留句麗國, 今古雛加駮位居是也. 其後復擊玄菟, 玄菟與遼東合擊, 大破之.


註 097 公孫康 : 公孫度의 아들로서 漢 建安 9년(204)에 그 父가 죽자 그 지위를 이었다. 207年 曹丕로부터 襄平侯 左將軍의 封爵을 받았다. 그는 建安 연간 중에 樂浪郡의 屯有縣 이남의 荒地를 분리해 따로히 帶方郡을 설치하였다. (『三國志』卷8 公孫度傳; 卷30「東夷傳」韓條 참조)

註 098 更作新國 : 이를 伊夷模가 새로히 수도를 옮겼던 것으로 보아, 『三國志』에서 언급한 涓(消)奴部에서 桂婁部로의 王室交替란 消奴部와 결탁하였던 拔奇에 대해 伊夷模가 승리하여 새로히 천도하였던 사실이 당시 中國人에 혼돈되게 전해져 消奴部에서 桂婁部로 王室이 바뀐 것처럼 記述케 되었다는 說도 있다. 그러나 王室의 交替는 그 훨씬 전에 있었다. ‘更作新國’의 의미는 中國人이 遼東郡에 붙은 拔奇 쪽을 正統으로 보았을 때, 그 弟인 伊夷模側의 朝廷은 새로운 국가를 구성한 것처럼 여기게 되어 그러한 표현이 나오게 된 듯 하다.

≪參考文獻≫

金哲埈, 「高句麗·新羅의 官階組織의 成立過程」『韓國古代社會硏究』1975.

註 099 拔奇遂往遼東 : 이에 대해『三國史記』山上王 即位條에는 ‘延優遣弟罽須 將兵禦之 漢兵大敗 ……(中略) …… 發岐 …… 不勝慙悔 奔至裴川自刎死 罽須哀哭 收其屍 草葬訖而還’이라 하여 궁지에 몰린 發岐가 裴川에 이르러 자살하였다고 전한다.



○ 建安(196~220)中, 公孫康註 097出軍擊之, 破其國, 焚燒邑落. 拔奇怨爲兄而不得立, 與涓奴加各將下戶三萬餘口詣康降, 還住沸流水. 降胡亦叛伊夷模, 伊夷模更作新國,註 098 今日所在是也. 丁謙曰, 伯固次子, 伊夷模, 東藩紀要云, 名男武, 稱故國川王. 伊夷模子, 位宮, 紀要云, 稱東川王. 惟東川未立以前, 尙有山上王, 名延優, 爲伊夷模弟. 立於建安二年, 在位幾五十年, 東川王始立. 此, 又脫漏. 且攷, 位宮, 乃太祖王宮孫, 並非曾孫. 又攷, 位宮, 爲毋丘儉所破, 始移都平壤. 朝鮮史與東藩紀要, 所載皆同. 作新國者, 指山上王, 築丸都山城之事. 吳其昌曰, 高麗國都, 在晋以前, 位於今日鴨綠江北岸奉天境內輯安懷仁附近. 劉宋以後, 始南移今日之平壤. 吳說, 已略見前. 詳見北平圖書館月刊. 姚範曰, 今日云云, 疑循舊文. 拔奇遂往遼東,註 099 有子留句麗國, 今古雛加駮位居是也. 其後復擊玄菟, 玄菟與遼東合擊, 大破之.


註 097 公孫康 : 公孫度의 아들로서 漢 建安 9년(204)에 그 父가 죽자 그 지위를 이었다. 207年 曹丕로부터 襄平侯 左將軍의 封爵을 받았다. 그는 建安 연간 중에 樂浪郡의 屯有縣 이남의 荒地를 분리해 따로히 帶方郡을 설치하였다. (『三國志』卷8 公孫度傳; 卷30「東夷傳」韓條 참조)

註 098 更作新國 : 이를 伊夷模가 새로히 수도를 옮겼던 것으로 보아, 『三國志』에서 언급한 涓(消)奴部에서 桂婁部로의 王室交替란 消奴部와 결탁하였던 拔奇에 대해 伊夷模가 승리하여 새로히 천도하였던 사실이 당시 中國人에 혼돈되게 전해져 消奴部에서 桂婁部로 王室이 바뀐 것처럼 記述케 되었다는 說도 있다. 그러나 王室의 交替는 그 훨씬 전에 있었다. ‘更作新國’의 의미는 中國人이 遼東郡에 붙은 拔奇 쪽을 正統으로 보았을 때, 그 弟인 伊夷模側의 朝廷은 새로운 국가를 구성한 것처럼 여기게 되어 그러한 표현이 나오게 된 듯 하다.

≪參考文獻≫

金哲埈, 「高句麗·新羅의 官階組織의 成立過程」『韓國古代社會硏究』1975.

註 099 拔奇遂往遼東 : 이에 대해『三國史記』山上王 即位條에는 ‘延優遣弟罽須 將兵禦之 漢兵大敗 ……(中略) …… 發岐 …… 不勝慙悔 奔至裴川自刎死 罽須哀哭 收其屍 草葬訖而還’이라 하여 궁지에 몰린 發岐가 裴川에 이르러 자살하였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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