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장관전서 청령국지의 세키카하라 전투
청장관전서 청령국지의 세키카하라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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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가강(源家康) 처음에 씨(氏)를 보과(保科)라 하다가 송평(松平)이라 고쳤으며, 가계(家系)는 청화왜황(淸和倭皇)에서 나왔다. 청화의 6세손에 뇌의(賴義)가 있었는데 이예수(伊豫守 이요 노가미)로서 국정(國政)을 행하였고, 또 그 6세손 의정(義定)이 국명(國命)을 잡고 관백(關白)의 일을 행하였다. 그 9세손 청강(淸康)이 절에서 자다가 손바닥에 시(是)자가 생기는 꿈을 꾸었는데, 어떤 사람이 점쳐서,
“시자는 일하인(日下人)이니 덕화(德化)가 천하에 미칠 징조이다.”
하였다. 이때부터 위무(威武)가 날로 더하여 그 손자 가강(家康)에 이르러 나라를 통일하니, 드디어 그 절을 시자사(是字寺)라고 이름지었다.
가강의 아버지 광충(廣忠)이 젊어서 죽으니, 가강은 고아가 되어 보대사(寶臺寺)에 몸을 의탁하여 살았다. 그 절의 중이 가강이 여느 사람과 다른 것을 알고, 어느날 부처 앞에서 제비를 뽑아 길흉(吉凶)을 점치고 빌기를,
“이 아이가 태수(太守)가 되게 하소서.”
하였더니, 가강이 곁에서 웃으며,
“대장부가 한 고을의 태수만 되고 말아야 하겠습니까?”
하므로, 중이 더욱 기특하게 여겼었는데, 가강이 자라서는 기량이 넓고 컸다.
가강이 처음에 준하부(駿河府)에 웅거하였는데, 수길(秀吉)이 함부로 무(武)를 써서 무덕(武德)을 더럽히는 것을 보고, 날이 감에 따라 더욱 군사를 정비하여 스스로 지키니, 수길이 여러 번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뒤에는 드디어 화친을 의논하여 기미(羈縻)하였다. 수길이 60주(州)를 통합하고 나서도 가강의 사람됨을 두려워하였는데, 드디어 북으로 중국을 침범할 생각을 갖게 되니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중국의 천자가 되면 일본을 전적으로 가강에게 붙여 주겠다.”
하므로, 가강이 웃으며 허락하였다.
수길이 드디어 군사를 내어 조선을 침범하며 자신은 명호옥에 가서 제군(諸軍)을 접응(接應)하였는데, 가강은 군사를 원조하지 않고 사자(使者)를 보내어 문안할 뿐이었다. 수길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서 병이 들어 돌아와, 사람을 보내어 만나기를 청하므로, 가강이 장사(壯士) 50기(騎)를 데리고 복견성(伏見城)으로 달려가니, 수길이 침실로 맞아들여 손을 잡고 극진히 반기고 애첩(愛妾)을 내어 주었다. 그때 수차(秀次)는 죽었고, 수뢰(秀賴)는 아직 어렸는데, 수길이 수뢰를 시켜 나와서 가강에게 절하게 하고는 가강에게 수뢰를 부탁하고, 또 국사(國事)를 감독하라고 권하였다. 가강이 사례하고 돌아가 제 딸을 수뢰에게 시집보냈다.
수길이 죽고 수뢰가 서서는 교만과 포학이 날로 심하였는데, 그 신하 삼성(三成)의 무리는 그에 따라 뜻을 맞추었다. 대개 수뢰가 덕(德)을 잃고 백성을 잃게 하여 제가 나라를 도모하려는 것이었는데, 수뢰는 도리어 충성스럽다고 생각하였으며, 또 어리석고 무식해서 아랫사람들이 조금씩 배반하였다.
그때 소서 행장(小西行長)이 실로 병권(兵權)을 쥐었고 가는 곳마다 대적할 자가 없었으므로 삼성이 가강과 행장이 틈이 나서 서로 도모하게 하고 제가 그에 따라 제어하려 하였다. 드디어 가강을 수뢰에게 참소하고 남몰래 행장을 돋우었다. 행장이 드디어 가강을 치니, 가강이 양성하던 정병(精兵)을 내어, 관원(關原)에서 한 낮과 두 밤을 맞붙어 싸우다가, 행장이 크게 져서 달아나 이취산(伊吹山)에서 죽었다. 이것을 관원지전(關原之戰) 또는 경장지역(慶長之役)이라 하는데, 경장은 왜황(倭皇)의 연호이다. 왜인은, 일본의 큰 싸움 중에서 관원 싸움보다 더한 것이 없고 그 다음이 원의경(源義經)의 일곡(一谷) 싸움과 적간관(赤間關) 싸움이라 한다.
가강의 군사가 적을 멀리 몰고 들어가 복견성(伏見城)에 이르니, 삼성의 군사가 패하였다. 드디어 수뢰ㆍ삼성 등을 죽이고 평씨(平氏)의 족속을 죄다 없애고 수길의 정체(政體)를 모두 바꾸었다. 수길이 대판(大阪)으로 옮아 와서 살면서 보화(寶貨)를 지고(地窖 움. 지하실(地下室))에 간직하여 그 축적이 이미 억만금(億萬金)이나 되는 데다가 대판의 호세(戶稅)ㆍ선세(船稅)와 시사(市肆)의 세를 다 대판으로 실어 날랐으므로 대판이 관서(關西)에서 가장 부성(富盛)하였으나, 가강은 강호(江戶)로 물러가 살면서 원뇌조(源賴朝)의 옛 제도를 회복하고 더 확대하였다.
등당 고호(藤堂高虎 ‘도오도오 다까도라’)라는 자가 가강에게,
“제장(諸將)의 처자를 강호에 볼모로 잡아 두면 치평(治平)의 상책(上策)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가강이 그 말을 옳게 여겨, 세 겹으로 성을 쌓고서 내성(內城)에 스스로 거처하였으며, 중성(中城)에는 각주(各州)의 태수(太守)의 부(府)를 둘러 두되 교사(巧奢)를 궁극히 하게 하고 교사를 금하지 않을 뿐이 아니라 스스로 비용을 도와 주기도 하였으며, 외성(外城)에는 사신(士臣)이 살게 하였으며, 또 그 밖에는 상공(商工)에 종사하는 서민이 살게 하였으며, 또 그 밖에는 해자[濠]를 만들고 해자 안에 목책[柵]을 세워 목책으로 50여 리를 둘렀다. 남의 숨은 비위를 고발하는 길을 활짝 열어 놓고는, 강호의 저택과 지방의 관부(官府)에서 태수들이 사치와 음란에 빠지는 것은 그 욕심대로 다하도록 허가하되, 문무(文武)를 익히는 것을 긍지로 여기고 스스로 좋아하는 자가 있는데 배반할 뜻을 가졌다 하여 고발당하면 다 극형에 처하므로 여러 고을의 태수들은 흔히 주색이 지나쳐서 일찍 죽어 좋은 명성을 내지 못하고 사사로이 교제하지도 못하였으며, 그 가신(家臣)들도 감히 사사로이 왕래하지 못하고 또 사사로이 병위(兵衛)를 벌이지 못하였다. 부에서 창기(娼妓)와 가까이하여 낳은 자녀는 문득 강호의 저택으로 옮겨 들여오게 하였다.
강호의 저택에 가 있는 것을 참부(參府)라 하고, 고을로 돌아가는 것을 어가(御暇)라 한다. 이를테면, 자년(子年 간지(干支)에 자(子)가 드는 해)ㆍ인년(寅年)ㆍ진년(辰年)ㆍ오년(午年)ㆍ신년(申年)ㆍ술년(戌年) 어느 달에 참부하였으면 축년(丑年)ㆍ묘년(卯年)ㆍ사년(巳年)ㆍ미년(未年)ㆍ유년(酉年)ㆍ해년(亥年) 어느 달에 어가하는데, 기간이 짧으면 1년 동안 참부하고 1년 동안 어가하며 길면 2년 동안 참부하고 1년 동안 어가한다.
가강이 계책을 써서 제장(諸將)을 어리석게 만들고서 자신은 검약(儉約)하고 아랫사람들을 너그럽게 거느렸으므로 오래 편안하였으나 감히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왜황(倭皇)을 구관(拘管)하기는 하였으나 신하로서의 예절을 버리지 않았고, 태수들을 겁속(劫束)하기는 하였으나 은혜로 돌보는 뜻은 줄지 않았으므로, 종일 한가히 있어도 상하가 무사하였다. 관동(關東)의 식읍(食邑 영지(領地))이 이미 많은 데다가 또 좌도(佐渡)의 금혈(金穴)을 차지하였는데, 금혈은 나라 안에서 한 군데에 있을 뿐이고 관백만이 그것을 관리하였으므로 온 나라 안에 부세(賦稅)가 없어도 나라의 비용이 충만하였다. 구품(九品)인 금이 있는데 다 관백(關白)이란 글자를 새겨서 나라 안에서 두루 쓰고, 정제(精製)한 금은 중국의 소주(蘇州)ㆍ항주(杭州)와 여러 외국에 널리 나가는데, 통상(通商)하는 외국이 모두 서른 남짓하다.
가강이 1년에 한 번 왜황에게 조근(朝覲)하다가 늙어서는 3년에 한 번 조근하고 그 뒤에는 또 5년에 한 번 조근하였었는데, 또 면배(面拜)를 청하니 조근을 면해 주었다. 그의 벼슬은 종1위(從一位) 우대신(右大臣)이고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에 임명되었으며, 스스로 순화장학양원별당 원씨장자(淳和獎學兩院別當源氏長者)라고 칭하였다. 명 나라 만력(萬曆) 26년(1598), 왜황의 위연호(僞年號) 원화(元和) 원년(1615)에 통일하고, 10년 뒤에 자리를 물려 주고, 또 9년 뒤에 죽었는데, 정1위(正一位) 태정대신(太政大臣)을 추증(追贈)하였다. 일광산(日光山)에 장사하고, 원당(願堂)을 세워 동조대권현궁(東照大權現宮)이라 부른다. 아들 아홉을 낳았는데, 둘째 아들 수충(秀忠)이 뒤를 이었다.
源家康。初以保科爲氏。改爲松平。系出淸和倭皇。六世。有賴義。以伊豫守行國政。六世孫義定。執國命。行關白事。九世至淸康。嘗宿僧寺。夢掌中生是字。人有占a259_158b之曰是字。曰下人也。德化覃於天下之兆。自是。威武日增。至其孫家康而一統焉。遂名其寺曰是字寺。家康父廣忠早夭。家康旣孤。依於寶臺寺。寺僧。知其爲非常人。嘗抽籤祝于佛前曰。願使此兒。貴爲太守。家康在傍笑曰。大丈夫當止一州太守而已耶。僧益奇之。及長器量宏大。初據駿河府。見秀吉黷武。家康日治兵自守。秀吉屢攻不克。後遂與議和。羇縻之。秀吉旣統合六十州。而尙憚家康之爲人。而遂有北犯中國之計。自言我若爲中原天子。則當以日本專屬家康。家康笑而許之。秀吉遂出兵。犯朝鮮。自往名護屋。a259_158c接應諸軍。家康不助兵。只遣使相問而已。秀吉旣不得志。淹病而還。遣人請見。於是。家康與壯士五十騎馳至伏見城。秀吉邀入臥內。握手極歡。出愛妾與之。時秀次已死。而秀賴尙幼。秀吉使之出拜家康。因托秀賴焉。又勸監國事。家康拜謝而歸。以其女。妻秀賴。秀吉死。秀賴立。驕虐日甚。其臣三成之徒。從而逢迎。葢欲使秀賴。失德失民。己自圖之。秀賴反以爲忠。又愚騃無識。羣下稍稍反之。時小西行長。實掌兵柄。所向無敵。三成。欲家康,行長。搆隙相圖。己從而制之。遂譖家康於秀賴。而私挑行長。行長遂擊家康。家康悉a259_158d出所養精兵。合戰于關原。一晝二夜。行長大敗走。死于伊吹山。是謂關原之戰。亦稱慶長之役。慶長者。倭皇之年號也。倭人以爲。日本大戰。無過於關原。其次爲源義經一谷赤關之戰云。家康長驅。至伏見城。三成軍敗。遂殺秀賴。三成等。盡滅平氏之族。一變秀吉之政。移居大坂。藏貨寶於地窖。秀吉之蓄積。旣億萬計。而大坂之廬稅,船賦,市肆之征。皆委輸于大坂。大坂之富。甲于關西。於是。退處江戶。盡復源賴朝舊制。而加大之。有藤堂高虎者。言于家康曰。質諸將妻子。置之江戶。則治平之上策也。家康然之。築三重城。而a259_159a自居內城。中城。環置各州太守府。使之窮巧極奢。不徒無禁。又自助費。外城。則士臣居之。又其外。商工庶人居之。又其外。爲濠而濠內樹柵。柵環五十餘里。廣開告訐之門。凡邸府諸守。沈湎奢淫。許令窮其慾。若有業文武。矜持自好者。謂有異志。被告訐。皆抵極罪。故諸州守多荒淫夭死。無令聞。無私交。其家臣。亦不敢私相問聞。又不敢私陳兵衛。在府。有近娼妓。生子女者。輒移入于江戶之邸。其就邸曰參府。之邑曰御暇。如子寅辰午申戌年某月。爲參府。則以丑卯己未酉亥某月。爲御暇。近則一年參府。一年御暇。遠則二a259_159b秊參府。一年御暇。家康旣設計。以愚諸將。而躬行儉約。御衆以簡。久而安之。不敢少懈。雖拘管倭皇。而臣禮不廢。雖劫束諸守。而恩意不衰。終日閒居。上下無事。關東之食邑旣多。而又占佐渡之金穴。金穴。國中。只有一處。而獨關白主之。故國中無賦稅而國用充溢。金有九品。皆刻關白字標。周行國中。其精金則泉流于蘓杭及海中諸國。諸國之通商者。凡三十有餘。歲一朝於倭皇。旣老。三年一朝。後又五年一朝。又請面拜。許免朝覲。其官曰從一位。右大臣。任征夷大將軍。自稱淳和弉學兩院別當源氏長者。大明萬曆二a259_159c十六年戊戌。倭皇僞元和元年統一。後十年而傳位。又九秊而死。贈正一位大政大臣。葬于日光山。立願堂。號東照大權現宮。生九子。第二子秀忠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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