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_왕건의 반란

삼국유사_왕건의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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貞明四年戊寅, 䥫原京衆心忽變, 推戴我太祖即位. 聞之遣使稱賀, 遂獻孔雀扇地理山竹箭等. 與我太祖陽和隂尅獻驄馬扵太祖, 三年冬十月率三千騎至曹物城 今未詳太祖亦以精兵來與之角. 兵銳未决勝負. 校勘 183欲權和以老其師, 移書乞和以堂弟王信為質, 亦以外甥真虎交質. 十二月攻取居西 今未詳等二十餘城, 遣使入後唐稱藩. 䇿授撿校太尉兼侍中判百濟軍事, 依前都督行全州刺史海東四面都統指揮兵馬判置等事百濟王, 食邑二千五百户.

校勘 183
조병순소장본에는 大로 되어 있다. 문맥상 太가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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貞明四年戊寅, 䥫原京衆心忽變, 推戴我太祖即位. 萱聞之遣使稱賀, 遂獻孔雀扇地理山竹箭等. 萱與我太祖陽和隂尅獻驄馬扵太祖, 三年冬十月萱率三千騎至曹物城 今未詳. 太祖亦以精兵來與之角. 萱兵銳未决勝負. 太校勘 183祖欲權和以老其師, 移書乞和以堂弟王信為質, 萱亦以外甥真虎交質. 十二月攻取居西 今未詳等二十餘城, 遣使入後唐稱藩. 唐䇿授撿校太尉兼侍中判百濟軍事, 依前都督行全州刺史海東四面都統指揮兵馬判置等事百濟王, 食邑二千五百户.


校勘 183 조병순소장본에는 大로 되어 있다. 문맥상 太가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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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분류정치>외교>절교>나라

색인어이름 : 太祖, 萱, 太校勘 183祖, 王信, 真虎

지명 : 䥫原京, 地理山

국명 : 後唐, 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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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분류
정치>외교>절교>나라
색인어
이름 : 太祖校勘 183祖, 王信真虎
지명 : 䥫原京地理山
국명 : 後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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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권 제2  >   제2 기이(紀異第二)  >   후백제(後百濟) 견훤(甄萱)  >   후백제와 고려의 대립(0918년 (음))


정명(貞明)註 380 4년 무인에 철원경(鐵原京)註 381의 민심이 졸지에 변하여 우리 태조(太祖)를 추대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견훤은 이 소식을 듣고 사자(使者)를 보내서 경하(慶賀)하고 마침내 공작선(孔雀扇)과 지리산(智異山)의 죽전(竹箭) 등을 바쳤다.

견훤은 우리 태조와 겉으로는 화친하면서 속으로는 시기하여 그는 태조에게 총마(驄馬)를 바치더니 (동광, 同光) 3년註 382 겨울 10월(925년)에는 기병(騎兵) 3천 명을 거느리고 조물성註 383 지금은 자세히 알 수 없다.까지 이르렀다. 태조도 역시 정병(精兵)을 거느리고 와서 그와 대적하였다. 견훤의 군사가 날래어 승부를 결정할 수가 없었다. 태조는 일시적으로 화친하여 견훤의 군사들이 피로하기를 기다리려고 글을 보내서 화친할 것을 요구하고 종제(從弟) 왕신(王信)을 인질로 보내니 견훤도 역시 외생질 진호(眞虎)를 볼모로 교환하였다. 12월에 견훤은 거서(居西)註 384 지금은 자세히 알 수 없다. 등 20여 성을 쳐서 빼앗고 사자를 후당(後唐)에 보내서 번신(藩臣)이라 일컬었다. 후당註 385에서는 그에게 검교태위 겸시중 판백제군사(檢校太尉 兼侍中 判百濟軍事)의 벼슬을 주고, 전과 같이 도독행전주자사 해동서면도통지휘병마판치등사 백제왕(都督行全州刺史 海東四面都統指揮兵馬判置等事 百濟王)이라 하고 식읍註 386 2천 5백 호로 하였다.


註 380

중국 5대 후량(後梁) 말제(末帝)의 연호로 915년~920년에 사용하였다.

註 381

현재의 강원도 철원군 일대이다.

註 382

중국 5대 후당(後唐) 장종(莊宗) 동광 3년(925)을 가리킨다(≪삼국사기≫ 권50 열전 견훤조).

註 383

현재 경상북도 구미시 금오산성으로 비정된다(김갑동, 「후백제 견훤의 전략과 영역의 변천」, ≪후백제 견훤정권과 전주≫, 주류성, 2001).

註 384

≪삼국사기≫ 권50 열전 견훤조에는 ‘居昌’으로 나와 있는데, 현재 경상남도 거창군이다.

註 385

923년 산서성에 기반을 두고 있던 이존욱(李存勗)은 후량(後梁)의 말제(末帝)를 살해하고 낙양에서 당을 재건한다는 기치 아래 후당을 건국하여 935년 후진이 세워지기까지 13년 동안 유지된 나라이다.

註 386

후삼국과 병존하던 북중국의 나라는 후량, 후당과 거란의 태조와 태종대인데, 17년 동안 존속했던 후량과는 거의 외교관계를 맺지 않고 주로 후당과의 교섭에 치중하였다. 후삼국이 후량과 통교하지 않은 이유는 후량의 정세불안과 같은 여러 가지가 있었겠으나, 그 가운데 하나는 후량이 당을 멸망시켰다는 대외 명분 때문이라 생각된다. 반면에 후당은 명분상으로나마 당을 잇는 정통왕조로 자처하였다. 한반도에서 패권을 다투던 후삼국이 후량과 통교함으로써 역적의 오명을 함께 쓸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후삼국은 스스로 정통왕조로 자처했고 또 그렇게 받아들여진 후당에 사신을 보내 자산의 정통성을 확보하려 하였다. 그러나 후백제는 신라와 고려가 후당에 빈번히 사신을 보낸 것과 달리 단 2차례의 사신만을 파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권덕영, 「후백제의 해외교섭 활동」, ≪후백제와 견훤≫, 서경문화사, 2000).

주제분류정치>외교>절교>나라

색인어이름 : 태조, 견훤, 진호

지명 : 철원경, 지리산

국명 : 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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