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오대사 고려전_당나라 말엽 고려 왕으로 고씨가 있었다.
신오대사 고려전_당나라 말엽 고려 왕으로 고씨가 있었다.
//목차
고려(高麗)
高麗는 본래 扶餘人의 別種이다.
長興 3년(A.D.932; 高麗 太祖 15)에 權知國事 王建이 사신을 보내오니,
開運 2년(A.D.945; 高麗 惠宗 2)에 建이 卒하자
그 땅에서는 銅·銀 등이 생산되었다.
高麗 사람들은 文字를 알고 글읽기를 좋아한다.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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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新五代史註 001 卷七十四
四夷附錄註 002 第三
高麗註 003
高麗, 本扶餘人校勘 001之別種也.註 004 其國地·君世見於校勘 002唐,註 005 比佗夷狄有姓氏,註 006 而其官號略可曉其義.註 007 當唐之末, 其王姓高氏.註 008 同光元年校勘 003 , 遣使廣評侍郞校勘 004註 009韓申一註 010·副使春部少卿註 011朴巖 校勘 005註 012來校勘 006, 而其國王姓名, 史失不紀.
校勘 001 「藝文本」에는 없다.
校勘 002 「藝文本」에는 ‘于’로 되어 있다.
校勘 003 「藝文本」에는 ‘二年’으로 되어 있고, 「藝文本」所引『五代會要』에는 ‘三年十一月’로 되어 있다.
校勘 004 「藝文本」所引『五代會要』에는 ‘郞’ 다음에 ‘上柱國’의 3字가 더 있다.
校勘 005 「藝文本」에는 ‘嚴’으로 되어 있다.
校勘 006 「藝文本」所引『五代會要』에는 ‘來’ 다음에 ‘貢方物’의 3字가 더 있다.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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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오대사(新五代史) > 사이부록(四夷附錄) > 고려(高麗) > 高麗는 본래 扶餘人의 別種이다.
○ 新五代史註 001
四夷附錄註 002
高麗註 003
高麗는 본래 扶餘人의 別種이다.註 004 그 나라의 地理와 君王의 世次는 『唐書』에 나타나 있으며,註 005 다른 오랑캐에 비교하면 姓氏도 있고,註 006 그 관직의 이름도 뜻을 대략 알 수 있는 것들이다.註 007 唐 말엽에는 그 王의 姓이 高氏였다.註 008
同光 원년(A.D.923; 高麗 太祖 6)에 [高麗에서] 正使로 廣評侍郞註 009 韓申一註 010과 副使로 春部少卿註 011 朴巖註 012 등을 [後唐]에 보내 왔는데, 그 國王의 姓名에 대해서는 史官이 잃어버리고 기록하지 못하였다.
註 001
新五代史 : 宋의 歐陽修가 『舊五代史』의 결함을 改修할 목적으로 撰述한 五代(後梁·後唐·後晋·後漢·後周) 54年間(907~960)의 正史. 本紀 12·列傳 45·考 3·世家 10·十國世家年譜 1·四夷附錄 3, 總 74卷.
唐代 이후에 이루어진 史書는 대부분이 官撰이었으나, 『新五代史』는 私撰으로 歐陽修가 죽은 후 神宗 熙寧 5年(1072)에야 비로소 刊行되어 正史가 되었다. 『新五代史』의 原名은 『五代史記』였고, 후에 『新五代史記』 혹은 『新五代史』라 부르고, 間稱하여 『五代史』라고도 하였다. 그 후 『薛史』가 正史로 편입되어 『舊五代史』라 부르자 『五代史記』는 『新五代史』라 부르게 되었다.
『舊五代史』가 陳壽의 『三國志』의 체제를 취하였다면, 『新五代史』는 『史記』나 『南史』·『北史』의 체제를 따랐다. 따라서 『舊五代史』가 斷代史 위주인데 반하여, 『新五代史』는 五代十國의 歷史를 通史的으로 叙述하였다.
『新五代史』의 내용을 살펴보면 卷1부터 卷12까지는 本紀로 「梁本紀」3卷, 「唐本紀」4卷, 「晋本紀」2卷, 「漢本紀」1卷, 「周本紀」2卷으로 되어 있다. 本紀의 筆法은 『春秋』를 답습하여 謹嚴하고 褒貶의 뜻이 확연히 나타나 있다.
卷13부터 卷57까지는 5朝의 列傳(家人·梁臣·唐臣·晋臣·漢臣·周臣·死節·死事·一行·唐六臣·義兒·伶官·宦者·雜傳) 45卷으로 되어 있다. 列傳 項目 중 前史書의 「忠義傳」을 「死節傳」과 「死事傳」으로 나누어 놓았는데, 이는 『新五代史』의 독창적인 것으로 다른 史書에서는 전하는 바가 없다. 또 「家人傳」 및 「義兒傳」도 本書의 독창적인 項目이며, 「梁·唐·晋·漢·周臣傳」 및 「雜傳」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李嗣昭 등 8人을 「義兒傳」이란 項目을 세워 입전시킴으로써 體例의 紛糾를 초래하였다.
卷58부터 卷60까지는 考(司天·職方)으로 되어 있다. 考는 前史의 志로써 「司天考」는 「天文志」로, 「職方考」는 地理州郡으로 명칭만 다를 뿐 실제는 같다.
卷61부터 卷70까지는 「十國世家」로 「吳·南唐·前蜀·後蜀·南漢·楚·吳越·閩·南平·北漢世家」로 이루어져 있다.
世家 외에 「十國世家年譜」1卷이 있는데 譜는 즉, 表로써 歐陽修가 復古를 좋아하여 삽입하였다.
卷72부터 卷74까지는 「四夷附錄」으로 契丹·奚·吐渾·達靼·高麗·渤海·新羅·黑水靺鞨傳이 실려있다.
‘鳴呼’로 시작되는 賛의 부분에서는 특히 若臣道德·華夷思想을 골자로 하는 歐陽修의 史觀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그와같은 封建思想을 배제하고 단지 原史料에 접근하려는 현대의 史家들은 『舊五代史』보다 낮에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歐陽修가 그러한 史觀에 입각하여 개성적인 기술을 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이 시대의 특징이 잘 나타나고 있고, 實錄은 同時代의 史實에 대해 서술하지 않는 점도 있는데 반하여, 『新五代史』는 직서하고 있는 점 등은 높이 평가된다. 또 『新五代史』가 實錄을 위주로 하지 않고 野史 등을 사료로 채용한 점도 傳統을 깨뜨리고 있는 점이다.
『新五代史』에는 宋의 徐無黨의 注가 기록되어 있지만 書法을 변명하기 위해 歐陽修가 口修한 것이라고도 전해지고 있다. 주석서로서는 淸의 彭元瑞의 『五代史記注』74卷이 있다.
≪參考文獻≫
『四庫全書總目提要』46 正史類 2.
高柄翊, 「中國正史의 外國列傳-朝鮮傳을 中心으로-」『東亞交涉史의 硏究』1970, 서울大 出版部.
楊家駱 主編, 『二十五史述要』(『史學叢書』第1輯 第3册, 世界書局印行)
李宗侗, 『史學槩要』1968, 正中書局.
註 002
四夷附錄 : 『新五代史』의 「四夷附錄」은 總3卷으로 되어 있으나 대부분은 契丹史로 일관되어 있다. 따라서 1·2卷은 契丹 관계를 싣고, 3卷에는 高麗·新羅를 비롯한 奚·吐渾·達靼 등 13개 주변 민족의 상태를 간략하게 기술하고 있다. 또 순서에 있어서도 夷蠻戎狄을 구분하여 叔述하지 않고 혼합하여 卷數만 나누었다.
『新五代史』에서는 傳統的인 華夷觀을 나타내는 ‘四夷’라는 通稱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고, 더구나 이것이 列傳 속에도 포함되지 못하고 ‘附錄’이라 하여 列傳보다도 더 格下시키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것은 『新五代史』의 叙述方式이
大致褒貶祖春秋 故義例謹嚴 叙述祖史記 故文章高簡 而事實則不甚經意(『四庫全書總目提要』46 新五代史條)
이라 한 점과 『四庫全書總目提要』 舊五代史條에서 『新五代史』를 ‘其筆削體例亦特謹嚴’이라 한 점에서 보아도 『新五代史』의 外夷傳이 격하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歐陽修가 『新唐書』 및 『新五代史』外夷傳의 序에서 보인 夷狄觀으로서도 당연히 추측되는 方式이다.
‘四夷’라 통칭한 外夷傳의 記述에서는 唐帝國이 當代의 아시아세계에서 차지했던 위치가 반영되고, 또 唐代人의 天下觀이 반영되어 「外國列傳」에서도 唐을 中心으로 하는 東夷·南蠻·西戎·北狄의 四夷의 구분이 篇目에도 적용되어 정연한 圖式的인 구분을 하고 있다. 『舊五代史』·『新五代史』에 있어서도 華夷差別觀에 입각한 名稱이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參考文獻≫
『四庫全書總目提要』46 正史類 2 舊五代史·新五代史條.
高柄翊, 「中國正史의 外國列傳」『東亞交涉史의 硏究』1970.
註 003
高麗傳 : 『新五代史』高麗傳의 總 字數는 284字이며, 내용에 있어서는 種族系統, 天姓, 高麗 太祖代부터 穆宗代에 이르는 中國과의 交涉事實이 記述되어 있다. 특히 末尾에 習俗과 朝獻한 著書를 記錄하면서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그 내용이 常道에 어긋난 것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舊五代史』에 비하여 高麗關係 記事를 많이 싣고 있으나, 역시 『唐書』에 실린 高句麗와 高麗를 분간하지 못한 채 앞부분은 高句麗에 대해, 후반부는 高麗에 대해 記述함으로써 혼동하고 있다. 다만 王建을 高麗國王으로 册封한 사실을 적고 있음이 『舊五代史』보다는 좀더 詳述하였다고 하겠다.
<참조>
『舊五代史』高麗傳 註 3)
高麗傳
『舊五代史』高麗傳의 總 字數는 240字에 불과하며, 그 내용은 種族系統·位置·官制·風俗 및 中國과의 交涉事實이 간략하게 叙述되어 있다.
그러나 『舊五代史』高麗傳에는 高句麗와 高麗를 혼동하여 前半部는 高句麗에 대한 사실을, 後半部는 高麗에 대한 사실들을 記述하고 있다. 이는 高句麗가 中國正史 중에서 『後漢書』에는 高句驪·句驪로, 『三國志』에는 高句麗로, 『宋書』·『梁書』에는 高句驪로, 『魏書』에는 高句麗로, 『周書』에는 高麗로, 『南史』·『北史』에는 高句麗로, 『隋書』에는 高麗로, 『舊唐書』·『新唐書』에는 高麗로 같은 國名을 混亂하게 써왔기 때문에 高氏 高句麗와 王氏 高麗를 同一國家로 보고 記述한 것이다.
그러나 高麗가 高句麗의 국명으로 불렀던 高麗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하더라도 承繼의 系統이 다른 이상 같은 나라 遺民의 易姓承繼로 보기는 어렵고, 다만 中國史에 있어서의 後梁·後唐·後晋·後漢·後周·後金 등과 같은 성격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舊五代史』高麗傳은 『舊唐書』와 『新唐書』의 내용을 轉載한 것인데, 이와 같이 混用이 된 誤謬를 범한 것은 缺點이 있는 前史의 史料를 無批判的으로 무조건 받아 轉載한 데에서 오는 誤記라고 생각된다.
≪參考文獻≫
『舊唐書』卷199上「東夷列傳」高麗條.
『新唐書』卷220「東夷列傳」高麗條.
高柄翊, 「中國正史의 外國列傳」『東亞交涉史의 硏究』1970.
金渭顯, 『高麗史中中韓關係史料彙編』1983, 食貨出版社, 臺北.
≪參考文獻≫
『舊唐書』卷199上「東夷列傳」高麗條.
『新唐書』卷220「東夷列傳」高麗條.
高柄翊, 「中國正史의 外國列傳」『東亞交涉史의 硏究』1970.
金渭顯, 『高麗史中中韓關係史料彙編』1983, 食貨出版社, 臺北.
註 004
高麗 本扶餘人之別種 : 『三國史記』「高句麗本紀」東明聖王條에 나오는 記事처럼 高句麗가 扶餘에서 나왔다는 『周書』·『魏書』·『隋書』·『舊唐書』·『新唐書』·『舊五代史』의 기록을 보고 옮긴 것이다.
<참조>
『舊五代史』高麗傳 註 4)
本扶餘之別種
『三國史記』「高句麗本紀」始祖 東明聖王條에 高句麗가 본래 扶餘에서 나왔음을 자세히 記錄하고 있다. 그러나 여러 文獻에는 高句麗가 扶餘에서 나왔다는 記錄과 扶餘의 別種이라는 記錄이 있다. 史書에 나오는 記事를 整理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高句麗가 扶餘에서 나왔다는 기사는 앞의 「高句麗本紀」始祖 東明聖王條에
及解夫婁(扶餘王)薨 金蛙嗣位 於是時 得女子於太白山南優渤水 問之曰 我是河伯之女 名柳花 與諸弟出游 時有一男子 自言天帝子解慕潄 誘我於熊心山下 鴨淥邊室中私之 卽往不返 父母責我無媒而從人 遂謫居優渤水 金蛙異之 幽閉於室中 爲日所炤 引身避之 日影又逐而炤之 因而有孕 生一卵 大如五升許 王棄之與犬豕 皆不食 又棄之路中 牛馬避之 後棄之野 鳥覆翼之 王欲剖之 不能破 遂還其母 以物裏之 置於暖處 有一男兒 破殼而出 骨表英奇 年甫七歲 嶷然異常 自作弓矢射之 百發百中 扶餘俗語 善射爲朱蒙 故以名云 …… 以朱蒙善射 與其矢小 而朱蒙殪獸甚多 王子及諸臣 又謀殺之 朱蒙母陰知之 告曰 國人將害汝 以汝才略 何往而不可 與其遲留而受辱 不若遠適以有爲 朱蒙乃與烏伊·摩離·陜父等三人爲友 行至淹㴲水 …… 與之俱至卒本川 觀其土壤肥美 山河險固 遂欲都焉 而未遑作宮室 但結廬於沸流水上居之 國號高句麗 因以高爲氏
라 하였고, 또 『周書』高麗傳에도
其先出於夫餘 自言始祖曰朱蒙 河伯女感日影所孕也 朱蒙長而有材畧 夫餘人惡而逐之 土于紇斗骨城 自號曰高句麗 仍以高爲氏 其孫莫來漸盛 擊夫餘而臣之
라 하였으며, 『魏書』高句麗傳에도
高句麗者 出於夫餘 自言先祖朱蒙(以下는 『三國史記』의 記事와 大同小異함)
이라 하였으며, 또 『隋書』高麗傳에도
高麗之先 出自不餘(以下는 『魏書』의 記事와 大同小異하므로 省略)
라 하였고, 또 後代에 나온 史書이지만 『明史』朝鮮傳에도
漢末 有扶餘人高氏據其地 改國號曰高麗 又曰高句麗
라 하였다.
正史 以外에 扶餘來源說을 적은 文獻으로는 『文獻通考』와 『高麗圖經』이 있다. 『文獻通考』에는 ‘其先出夫餘’라 하였고, 『高麗圖經』에는 ‘先是 夫餘王得河神之女’로 시작하여 그 내용은 대개 『三國史記』記事를 略述하여 실었다.
또 扶餘의 別種이라는 설을 실은 史書도 있다. 『舊唐書』高麗傳에는 ‘高麗者 出自扶餘之別種也’라 하였고, 『新唐書』高麗傳에도 ‘高麗 本扶餘別種也’라 하였다. 이 『舊唐書』·『新唐書』의 記事를 따라서 『舊五代史』·『新五代史』·『元史』까지도 모두 高句麗를 扶餘의 別種으로 記錄하였다.
이 別種이라는 뜻은 별개의 種族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出自扶餘’와 ‘出扶餘別種’라는 多小의 意味上 差異가 있다. 이는 아마도 『梁書』에서 ‘其後支別爲句驪種也’라는 表現과 같은 意味로 해석된다.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3「高句麗本紀」1 始祖 東明聖王條.
『梁書』卷54「東夷列傳」高句驪條.
『魏書』卷100「列傳」高句麗條.
『周書』卷49「異域列傳」高麗條.
『隋書』卷81「東夷列傳」高麗條.
『舊唐書』卷199上「東夷列傳」高麗條.
『新唐書』卷220「東夷列傳」高麗條.
『明史』卷320「外國列傳」朝鮮條.
『文獻通考』卷325 高句麗條.
『高麗圖經』卷1 始封條.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3「高句麗本紀」1 始祖 東明聖王條.
『魏書』卷100「列傳」高句麗條.
『周書』卷49「異域列傳」高麗條.
『隋書』卷81「東夷列傳」高麗條.
『舊唐書』卷199上「東夷列傳』高麗條.
『新唐書』卷220「東夷列傳」高麗條.
『舊五代史』卷138「外國列傳」高麗條.
註 005
其國地·君世見於唐 : 『舊唐書』에서 역시 高句麗의 位置와 官階, 歷代王과 使行往來, 戰爭 등을 비교적 자세히 다루고 있다.
≪參考文獻≫
『舊唐書』卷199上「東夷列傳」高麗條.
註 006
比佗夷狄有姓氏 : 소위 中原의 邊彊民族은 대개 姓氏가 없었다. 그러나 漢族과 政治, 文化的인 交涉을 가지면서 支配層은 그 영향을 받거나 賜姓을 받아서 姓을 갖게 된다. 예컨대 契丹은 唐 太宗때 ‘李’氏로 賜姓되었고, 阿保機는 ‘耶律’로 氏姓을 삼았으며, 契丹의 歷代妃族인 ‘蕭’氏도 契丹建國 初에 비로소 姓을 가졌었다. 그밖에 契丹庶人은 氏姓이 없다. 있었다면 漢族, 渤海, 高麗人이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또 西夏도 唐末에 唐의 宗姓인 ‘李’氏로 賜姓되었다가 宋代에 와서는 다시 ‘趙’氏로 賜姓된 바 있다.
≪參考文獻≫
『宋史』卷485「外國列傳」西夏條.
金渭顯, 『契丹的東北政策』1981, 華世出版社, 臺北.
吳廣成, 『西夏書事』1968, 廣文書局.
註 007
而其官號略可曉其義 : 大對盧(比一品), 太大兄(比正二品), 傉薩(都督), 道使(刺史) 등의 記事들이 나오는데 이를 두고 이른 것이다.
≪參考文獻≫
『舊唐書』卷199上「東夷列傳」高麗條.
註 008
當唐之末 其王姓高氏 : 當唐之末은 晩唐을 말하는데 晩唐은 文學에서 區分하는 時代區分이지만 文宗부터 哀帝까지(827~907)를 말한다. 이때는 高句麗가 滅亡된 지 오래다. 그 당시의 高句麗는 668年에 멸망하였다. 이런 高句麗를 數百年이 지난 뒤에도 存續한 것처럼 記錄한 것은 文獻史學이 안고 있는 단점을 그대로 노출한 증거이다.
<참조>
『舊五代史』高麗傳 註 19)
其國遂自立君長 前王姓高氏
앞의 문장 전부가 高句麗에 대한 記事이다. 이것은 高句麗와 高麗를 混同한 데서 온 것이다. 高句麗의 王姓은 高氏 또는 扶餘氏이고, 高麗의 王姓은 王氏이다. 그러나 高句麗와 高麗는 嚴然히 다른 나라이다. 高句麗가 中國의 여러 史書에 高句麗, 高句驪, 高麗, 句驪 등으로 記錄되어 있지만 原來의 國名은 高句麗이다. 설사 高麗가 高句麗의 國名으로 불렀던 高麗를 그대로 使用하였다 하더라도 承繼의 系統이 다른 이상 같은 나라 遺民의 易姓承繼로 보기는 어렵고, 다만 中國史에 있어서의 後梁·後唐·後晉·後漢·後周·後金 등과 같은 性格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高麗의 前身인 泰封의 弓裔도 901年(新羅 孝恭王 5)에 正式으로 稱王하고 國號를 高麗라고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稱王하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내세우기를 ‘往者新羅請兵於唐 以破高句麗 故平壤舊都鞠爲茂草 吾必報其讎’(『三國史記』「弓裔列傳」)라고 하였으나 그는 明白히 新羅의 王族이었다. 『三國史記』「弓裔列傳」에 의하면 弓裔는 ‘姓金氏 考第四十七憲安王誼靖 母憲安王嬪御 失其姓名 或云 四十八景文王膺廉之子’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高句麗의 復興 또는 高句麗를 위한 報復運動처럼 말한 것은 民心을 얻기 위한 한 방편이었다고 볼 수 있다. 李丙燾는 이에 대하여 回顧的 感情에 의하여 北方의 人心을 激動 또는 收拾하기 위한 一時的인 方便에 불과한 것이라고 하였다(『韓國史』p.2).
그러나 高麗가 標榜한 것은 泰封과는 달리 高句麗의 復興을 建國의 理念으로 삼아 항상 北方에 대한 關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미 高麗 太祖 卽位年에 옛 高句麗의 首都인 平壤을 重視하여서 大都護府로 삼고, 또 후에 西京으로 昇格시키고 良家의 子弟들을 옮겨 살게 하여 北方開拓의 中心地로 삼아왔다. 太祖는 그 후에도 계속 北方進出에 關心을 가져 왔었다. 이러한 高麗의 政策이 文獻上 明白히 吐露된 것은 993年(成宗 12) 契丹의 第一次 侵冦 時 高麗의 內史侍郞 徐熙와 契丹將 蕭恒德과의 談判 때이다(蕭恒德을 『高麗史』에는 蕭遜寧이라고 記錄되어 있으나, 『遼史』에서는 恒德으로 記錄되어 있다. 『遼史』「聖宗本紀」에 의하면 恒德의 字가 遜寧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遜寧이라 할 것이 아니라 恒德이라 하여야 옳을 것이다). 蕭恒德이 徐熙와 面對하고 꾸짖기를
汝國 興新羅地 高句麗之地 我所有也 而汝侵蝕之 又與我連壤 而越海事宋 大國是以來討 今割地以獻 而修朝聘 可無事矣(『高麗史節要』成宗 12年 10月條)
라 하였다. 이에 徐熙가 對答하기를
非也 我國 卽高句麗之舊也 故號高麗 都平壤 若論地界 上國之東京 皆在我境 何得謂之侵蝕乎(上同)
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內容으로 보면 高麗는 一時的으로 高句麗의 後身으로 自處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過去에 관한 民族的 歷史意識을 表白한 것이라 하겠다. 어쩌면 이러한 高麗의 意識이 中國에 傳해진 것이 訛傳된 탓인지는 몰라도 各史에 登載된 記事는 한결같이 高句麗에서 高麗로 承繼된 양 記錄되고 있다. 그 例를 몇 가지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宋史』高麗傳에
高麗 本曰高句麗 …… 高宗命李勣征之 遂拔其城 分其地爲郡縣 唐末 中原多事 遂自立君長 後唐同光·天成中 其主高氏累奉職貢 長興中 權知國事王建承高氏之位遣使朝貢
이라 하였다. 그러나 同光(923~925)·天成間(926~929)에 自立한 高氏君主가 職貢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때에는 高氏가 아닐뿐 아니라 王氏라 하더라도 王氏高麗는 이미 918年(後梁 末帝 貞明 4)에 建國하였다. 그리고 長興中(930~933)에는 이미 太祖 王建이 建國한 지 13年부터 16年이 되는 해이다. 그러므로 이 記事는 承繼問題나 年代가 맞지 않는다.
또 『金史』高麗傳에서는
唐初 靺鞨有粟末·黑水兩部 皆臣屬于高麗 …… 女直雖舊屬高麗 不復相通者久矣及金滅遼 高麗以事遼舊禮稱臣于金
이라 하였다. 여기서의 唐初는 高句麗를 指稱함이요, ‘以事遼舊禮稱臣’은 高麗를 말함이다. 그러나 ‘女直雖舊屬高麗’라 한 高麗의 指稱은 역시 高句麗를 두고 하는 말이다. 역시 같은 나라로 混同하고 있다.
또 『元史』高麗傳에서도
高麗本箕子所封之地 又扶餘別種嘗居之 …… 後闢地益廣 并古新羅·百濟·高句麗三國而爲一 其主姓高氏 自初立國至唐乾封初而國亡 垂拱以來 子孫復封其地 後稍能自立 至五代時 代主其國遷都松岳者 姓王氏 名建
이라 했다. 위의 文章에서 內容을 살펴보면 唐 乾封初에 高句麗가 망했다고 되어 있으나 乾封은 唐 高宗의 年號로 666~667年 兩年이다. 그러므로 乾封初라면 當然히 666年이 된다. 그러나 高句麗의 滅亡은 總章 元年(668)이므로 2年의 差가 생기며, ‘垂拱以來 子孫復封其地’라 하였는데 則天武后(唐 太宗) 때의 年號가 垂拱으로 685年부터 688年까지이다. 이때는 高句麗의 遺民國인 渤海(699년 建國)나 其他의 遺民集團도 없었던 때이다. 그러므로 ‘垂拱以來’라는 上限은 意味가 없으며, 또 ‘至五代時 代主其國遷都松岳者 姓王氏’라는 文章도 흡사 王建이 高氏를 代身하여 바로 卽位하여 平壤에서 松岳으로 遷都한 것처럼 보이는데 이도 역시 잘못된 것이다.
또 『明史』朝鮮傳에서는
後唐時 王建代高氏 兼併新羅·百濟地 徙居松岳 曰東京 而以平壤爲西京
이라 하였는데 여기서도 역시 王建이 곧 高氏를 代身하게 된 것처럼 記錄하고 있으며, 松岳이 곧 開京인데 잘못 알고 東京이라 한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은 誤謬인 前史의 記錄을 批判없이 받아들인 데서 오는 缺點이라 해야 하겠다.
이것이 私撰史料에도 그대로 옮겨지고 있다. 馬端臨의 『文獻通考』에는 아예 高麗를 高句麗條에서 같이 다루고 있다. 즉, 『文獻通考』高句麗條에
唐末中原多事 遂自立爲君長 後唐同光元年 遣使奉貢 其王姓高氏名字史失不紀 天成中 復入貢 長興中 權知國事王建承高氏之位
라 하여 泰封에서 이어졌다거나 新羅에서 承繼된 것이 아니고 역시 高句麗에서 이어진 것으로 되어 있으며, 또 後兢의 『高麗圖經』에서도
王氏之先 蓋高麗大族也 當高氏政衰 國人以建賢 遂共立爲君長 後唐長興三年 遂自稱權知國事
라 하여 高氏之政이 衰微할 때 民人共立하여 王建을 세운 것으로 되어 있으며, 또 孫穆의 『雞林類事』에도
高麗王建 自後唐長興中 始代高氏爲君長
이라 하여 역시 마찬가지로 高氏를 代身한 것으로 記載하고 있다.
이와 같은 錯誤는 缺點이 있는 史料를 可信性 批判없이 무조건 받아 옮겨 놓은데 원인이 있다. 하물며 우리의 모든 史書가 王建을 太祖로 諡를 올리고 새 建國者로 기록하고 있으니 高句麗와 高麗가 다른 나라라는 데에 대해서는 또 다른 異論이 있을 수 없다.
≪參考文獻≫
『三國史記』卷50「列傳」10 弓裔條.
『三國遺事』卷1「王曆」1 後高麗條.
『高麗史節要』卷2 成宗文懿大王 12年 10月條.
『宋史』卷487「外國列傳」高麗條.
『遼史』卷13「聖宗紀」4.
『金史』卷135「外國列傳」高麗條.
『元史』卷208「外夷列傳」高麗條.
『明史』卷320「外國列傳」朝鮮條.
『雞林類事』
『文獻通考』卷325「四裔考」高句麗條.
『高麗圖經』卷1 王氏條.
李丙燾, 『韓國史』(中世篇), 1961.
金渭顯, 『契丹的東北政策』1981.
註 009
廣評侍郞 : 泰封遺制로 太祖(王建)때까지 있었던 廣評省(成宗 元年에 御事都省으로, 成宗 14年에 尙書都省으로, 忠烈王때 僉議府로, 恭愍王때 尙書省 또는 三司로 改稱되었다)의 正三品(?) 벼슬이다. 高麗가 五代諸國 등에 보낸 使臣은 廣評侍郞 官職이 많았었다. 예컨대 944年(惠宗 元年)의 韓玄珪, 952年(光宗 3)의 徐逢, 955年(光宗 6)의 荀質, 962年(光宗 13)의 李興祐 등이 모두 廣評侍郞이었다.
≪參考文獻≫
李丙燾, 『韓國史』(中世篇), 1961, 乙酉文化社.
金庠基, 『高麗時代史』1961, 東國文化社.
註 010
韓申一 : 韓申一은 941年(太祖 24)에 後晋에 보냈던 王子 大相 王申一과 同一人으로 보이며, 姓이 韓이 아니고 王이 잘못된 것이 아닐지 모른다. 太祖의 一族인 王姓이 可合할 것으로 사료된다.
≪參考文獻≫
『高麗史』卷1「世家」1 太祖條.
『高麗史節要』卷1 太祖神聖大王條.
註 011
春部少卿 : 春部少卿은 곧 春卿을 指稱하는 것일 것이다. 春卿은 周代의 春官으로 邦禮를 맡는 6卿의 하나이다. 이로 인해서 보통 禮部官을 春卿이라 하였다. 여기 春部少卿은 곧 高麗의 禮賓省의 從三品 벼슬로 賓客과 燕亨을 管掌하는 官職일 것이다.
≪參考文獻≫
李丙燾, 『韓國史』(中世篇), 1961.
註 012
朴巖 : 朴巖은 923年(太祖 6) 吳越國 文士로 高麗에 來投한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中國語에 能通하여 副使로 擧用된 것으로 보인다.
≪參考文獻≫
『高麗史』卷1「世家」1 太祖條.
『高麗史節要』卷1 太祖神聖大王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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